제중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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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혜원 정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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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고종 22) 개원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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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혜원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제중원은 1885년(고종 22) 개원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이다. 1884년 갑신정변 당시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알렌이 서양의술로 민영익을 치료한 일을 계기로 추진되었다. 고종은 알렌의 서양식 병원건립 건의를 받아들여 1885년 광혜원을 한성 재동에 설치했다. 이후 제중원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했다. 1885년 국립병원으로 개원하여 진료활동을 했다. 1894년 6월 갑오개혁의 행정관제개혁 때 내무아문 아래 위생국을 설치하여 종두 및 의약·전염병 예방업무 등을 맡게 하면서 내무아문으로 폐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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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85년(고종 22) 개원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내용

처음 명칭은 국립 광혜원(廣惠院)이었다. 1876년 문호개방 이후 고종과 조선 정부는 총체적인 근대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때 의료 근대화도 구상하였다.

1881년 일본에 파견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을 통해 서양식 병원을 탐색하고, 1884년 정부 신문인 『한성순보』의 사설을 통해 서양의학 교육기관의 설립과 양의(洋醫) 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1884년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가 서양식 병원 설립을 제안했을 때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였다. 이때 발생한 갑신정변(甲申政變) 당시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安蓮)이 우정국사건(郵征局事件) 당시 중상을 입은 민영익(閔泳翊)을 서양의술로 살림으로써 서양식 국립병원 설립이 가속화되었다.

고종은 알렌의 서양식 병원건립 건의를 받아들여 1885년 2월 29일(음력)[4월 14일(양력)] 광혜원(House of Extended Grace)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곧 한성 재동에 설치된 국립병원이었다.

건물은 홍영식(洪英植)의 집(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을 쓰게 하였는데, 광혜원이라는 명칭은 2주일 만에 백지화되고, 그 해 3월 12일(음력)[4월 26일(양력)]에 새로 제중원(濟衆院: 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이라는 이름을 붙여 개원 당시부터 소급 적용하였다.

제중원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하루에 최고 70명의 환자를 보게 된 때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 뒤 환자의 수가 늘어나서 진료업무가 복잡하게 되자 알렌은 한때 미국 감리교회 선교의 스크랜턴(Scranton, W. B.)의 도움을 받기도 하다가, 곧 추가로 파견된 선교의 헤론(Heron, J. H.)과 함께 진료에 종사하였다.

1886년에는 다시 미국으로부터 여의(女醫) 엘러스(Elless, A. J.)가 파견되어 제중원에 부인부(婦人部)를 신설하고 여인들의 진료에 종사하였다.

이렇게 제중원의 진료업무가 더욱 번창하자 1887년 초 조선 정부는 한성 남부 동현의 왕실 소유 부지(지금의 을지로 입구와 2가의 중간, 구 한국외환은행 본점 자리)로 제중원을 옮겼다.

1887년 가을 알렌이 미국특파전권대사 박정양(朴定陽)의 수행원으로 떠나게 되자 제중원의 진료업무는 헤론이 전담하게 되었고, 부인부의 여의는 엘러스가 혼인하게 됨에 따라 호르톤(Horton, L. S.)으로 교체되었다.

그 뒤 알렌이 돌아왔으나 미국 공사관 서기관이 되었으므로 병원진료는 하지 않았고, 1890년 여름 헤론이 병사하자 캐나다에서 다시 파견된 빈턴(Vinton, C. C.)이 의료업무를 이어 맡다가 1893년 다시 추가로 파견된 에비슨(Avison, O. R., 魚丕信)에게 인계되었다.

제중원은 1885년 국립병원으로 개원하여 진료활동을 한 이래, 1894년 6월 갑오개혁의 행정관제개혁 때 내무아문 아래 위생국(衛生局)을 설치하여 종두(種痘) 및 의약 · 전염병예방업무 등을 맡게 하면서 7월 18일 내무아문으로 폐합되었다.

이후 에비슨은 병원 운영을 맡은 관리들의 부패로 업무를 수행할 수 없어 정부에 쇄신을 건의하였다. 고종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모든 권리를 에비슨에게 맡겨 설립한 지 9년 만에 경영권도 완전히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관되었다.

그리고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Severance, L. H.)의 재정지원으로 1904년에 남대문 밖 복숭아골[桃洞]로 현대식 병원을 지어 옮기고 세브란스병원이라 하였다. 에비슨에 의하여 1899년 제중원학교가 설립되었다가 1904년 세브란스병원으로 개편되면서 제중원이라는 이름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한편 1886년 3월 29일, 서양의학을 교육하고 양의(洋醫)를 양성하기 위한 국립 제중원의학당이 개교했다. 아울러 1886년 5월 미국 의사들의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알렌과 헤론에게 당상관(堂上官)의 벼슬이 하사되었다.

조선 정부는 건물과 예산을 제공하고 학생들을 선발했으며, 제중원 의사 알렌은 교수들을 섭외하고 교육에 필요한 의학도구 등을 준비했다. 본과 학생은 12명이었으며 영어, 화학, 해부, 약 조제법 등을 배웠다.

그러나 제중원의학당에서 정식 졸업생은 단 한 명도 배출되지 못했고, 1893년 에비슨이 내한하면서 의학교육이 재개되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제중원 이야기』(김상태, 웅진지식하우스, 2010)
『제중원』(박형우, 몸과 마음, 2002)
『한국근대보건의료사』(신동원, 한울아카데미, 1997)
『의학백년』(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6)
「한국서의학사」(김두종,『한국현대문화사대계』4,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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