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계아(季雅). 기묘명인(己卯名人)의 한 사람이다. 판중추부사 이계전(李季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찬성을 지낸 이파(李坡)이고, 아버지는 이덕윤(李德潤)이며, 어머니는 이찬(李儧)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 할아버지 이파(李坡)가 화를 입자 연좌되어 영천으로 유배되었으나 도망하였고, 중종반정 후 사면되었다. 진사과를 거쳐 1511년(중종 6)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정자에 제수되었다.
1513년 박사에 제수되어 유자광(柳子光)의 삭제된 공훈을 회복시키는 데 반대하였으며, 이듬해부터 부수찬, 정언, 수찬, 부교리, 헌납을 거쳐 1517년 교리에 재직하면서 윤순(尹珣)의 처 구씨의 음행을 문제삼아 탄핵하였고, 정몽주(鄭夢周) 문묘종사를 주장하였다.
이듬해 이조정랑에 올라 문과 관시·한성시의 시관(試官)을 맡았으며, 이어 두 자급 뛰어올라 사헌 장령에 제수된 후 응교, 교리를 거쳐, 1519년(중종 14) 사간원 사간에 제수되었으며, 불교 폐단 척결에 노력하였다. 그 후 사헌장령에 보임되었으나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귀양갔다가 1537년(중종 32) 사면으로 직첩을 되돌려 받았다.
이어 이듬해 응교·홍문관전한·사간원사간을 거쳐, 1539년 공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사은사(謝恩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1541년부터 우윤, 경상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를 역임했고, 명종이 즉위하자 한성부 우윤에 올랐다가, 1549년(명종 4) 동지중추부사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