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우는 학문을 좋아하여 평소 이벽(李檗)과 친하게 지냈고, 1784년, 이벽의 주1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이승훈(李承薰)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입교 후 천주교 신앙의 열렬한 전파자가 되어 두 동생인 이우(履禹)와 현우(顯禹)를 입교시켰으며, 중인과 양반은 물론 같은 역관 집안의 여러 사람을 개종시켰다. 또한 장악원(掌樂院) 앞 그의 집에서 천주교 집회를 자주 가졌다. 김범우의 집에는 『천주실의(天主實義)』, 『칠극(七克)』 등 천주교 서적이 비치되어 있었고, 서학에 관심 있는 많은 사람들이 신분을 초월하여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초기 천주교회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최인길(崔仁吉), 최필공(崔必恭), 허속(許涑), 김종교(金宗敎) 등 중인들은 김범우에 의하여 천주교에 입교한 인물들이다. 또한 홍익만(洪翼萬), 변득중(邊得中), 윤지충(尹持忠) 등의 양반들도 김범우의 집을 드나들며 천주교 서적을 접함으로써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김범우의 집에서 이승훈과 정약전(丁若銓) · 정약종(若鍾) · 정약용(若鏞) 3형제 및 권일신(權日身) 부자 등 양반과 중인 수십 명이 모여 이벽의 설교를 듣고 있을 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형조의 관리가 도박으로 의심하고 수색한 끝에 예수 주2과 천주교 서적들을 압수하여 형조에 바치게 되었다. 형조판서 김화진(金華鎭)은 사대부 자제들은 알아듣게 타일러 돌려보내고 김범우와 최인길만 가두었다. 이것이 1785년 봄에 일어난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다. 김범우가 주3 것을 거부하자 김범우에게 여러 가지 고문이 가해졌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앞서 주4 권일신은 그의 아들과 이윤하(李潤夏) · 이총억(李寵億) · 정섭(鄭涉) 등과 함께 형조로 들어가 김범우와 같은 교인이니 처벌해 달라고 하며 주5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형조판서는 그들이 사대부의 자제이므로 다시 타일러 돌려보내고, 김범우에게만 배교할 것을 강요하였다. 함께 붙잡힌 중인 최인길은 김범우와 같이 처벌받기를 요구하여 10여일간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김범우는 천주교 주6 여부를 다짐하는 판서의 심문에 “ 서학(西學)에는 좋은 곳이 많고 그른 곳을 모른다.”라고 대답하여 마침내 밀양으로 주7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소장했던 책자는 형조의 뜰에서 모두 불태워졌다. 김범우의 유배지는 그의 동생인 김현우의 증언과 달레(Dallet)의 기록을 중심으로 충청북도 단양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1987년 이후 김범우 가문에서 전승되는 고문서와 그의 묘소가 밀양에서 발견되어 이를 근거로 밀양으로 귀양간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또한 그의 아내인 천령 현씨 가계가 밀양으로 이주한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한편, 김범우는 유배된 뒤에도 계속 천주교를 신봉하면서 큰소리로 기도하고 전도하였으나, 주8을 당한 상처의 악화로 유배된 지 1년 만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