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전은 조선후기 전적, 병조좌랑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758년(영조 34)에 태어나 1816년(순조 16)에 사망했다. 소년 시절 서울에서 살면서 이익의 학문을 접하고 심취했다. 관직 생활 중에는 서양 학문과 사상을 먼저 접한 이벽·이승훈 등 남인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천주교에 마음이 끌려 믿게 되었다. 1801년 신유사옥이 일어나 아우 약용과 함께 화를 입어 신지도를 거쳐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여기서 복성재를 지어 섬의 청소년들을 가르치다가 끝내 풀려나지 못하고 16년 만에 죽었다. 『자산어보』를 비롯한 여러 저서를 남겼다.
어릴 때부터 매우 재주가 있고 총명했으며 성격이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아 거리낌이 없었다. 소년시절부터 서울에서 이윤하(李潤夏) · 이승훈(李承薰) · 김원성(金源星) 등과 깊이 사귀면서 이익(李瀷)의 학문에 접하여 심취하였다. 이어 권철신(權哲身)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더 깊이있게 배웠다.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자, 이에 만족하지 않고 학문에 열중하여 1790년 증광문과에 응시,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전적 · 병조좌랑의 관직을 역임하게 되었다.
또, 서양 학문과 사상에 접한 바 있는 이벽(李檗) · 이승훈 등 남인 인사들과 교유하고 특별히 친밀하게 지냈는데, 이들을 통해 서양의 역수학(曆數學)을 접하고 나아가 천주교에 마음이 끌려 신봉하기까지 하였다.
1801년(순조 1)에 신유사옥이 일어나 많은 천주교 신도들이 박해를 입게 되자, 아우 약용과 함께 화를 입어 약용은 장기를 거쳐 강진에 유배되고, 그는 신지도(薪智島)를 거쳐 흑산도(黑山島)에 유배되었다.
여기서 복성재(復性齋)를 지어 섬의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틈틈이 저술로 울적한 심정을 달래다가 끝내 풀려나지 못하고 16년 만에 죽었다. 저서로 『자산어보(玆山魚譜)』를 비롯, 『논어난(論語難)』 · 『동역(東易)』 ·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자산어보』, 『송정사의(松政私議)』가 전해오고 있다.
『자산어보』는 그가 유배되었던 흑산도 근해의 수산생물을 실지로 조사, 채집하여, 이를 어류(魚類) · 패류(貝類) · 조류(藻類) 및 해금(海禽) · 충수류(蟲獸類) 등으로 분류, 각 종류의 명칭 · 분포 · 형태 · 습성 및 이용에 관한 것까지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수산학 관계 서적이라 할 수 있는 명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