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본명은 수증(守曾), 호는 연담(蓮潭). 운규(雲圭)는 별칭이다. 세종의 열여덟째 아들인 담양군(潭陽君)의 13대손으로, 흥선군 이하응(李昰應)과 친밀하게 지냈으며 조대비(趙大妃)의 친정과 인척관계가 있었다.
일찍이 문참판(文參判)의 벼슬을 한 적이 있으나 국운이 쇠약하여짐을 느끼고 서울을 떠나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군 양촌면 모촌리의 일명 띠울마을에 은거하였다.
그의 학통은 이서구(李書九)의 뒤를 이어 천문 · 역산(曆算) · 역학 · 시문에 능통하였고, 특히 사람을 판별하는 지인지감(知人之鑑)에 밝았다. 그래서 최제우(崔濟愚)와 김치인(金致寅), 그리고 김항(金恒) 등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배웠다.
그러던 중 1861년(철종 12)에 최제우 · 김광화 · 김항을 차례로 불러, 최제우에게는 선도(仙道)의 전통을 계승할 자라 하여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라는 3 · 7자 주문을 독송하며 심신을 연마하라고 하였으며, 김광화에게는 불교의 전통을 계승할 자라 하여 “남문(南門) 열고 바라치니 계명산천(鷄鳴山川) 밝아온다.”라는 주문을 주면서 수련을 하라고 하였다.
김항에게는 유교의 전통을 계승할 자라 하여 “관담(觀淡)은 막여수(莫如水)요, 호덕(好德)은 의행인(宜行仁)을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하니 권군심차진(勸君尋此眞)하소.”라는 시를 남겨주고 표연히 띠울마을을 떠나 무주 용담(龍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은거하다가 다시 본고향인 천안 목천(木川)으로 갔다고 하나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뒤 최제우는 동학을 일으켰고, 김광화는 남학(南學)을 창시하였으며, 김항은 19년 동안 ‘영동천심월’의 뜻을 알기 위하여 정진하다가 1879년 깨달음을 얻고 『정역(正易)』의 체계를 만들어 내었다고 한다.
따라서, 동학과 남학, 그리고 『정역』 모두 그의 사상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나 이 주장은 대개 김항의 계통에서 제시하고 있다. 세 제자 중 김항만이 그와 사돈관계를 맺은 것을 보아도 양자의 돈독한 유대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