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학 ()

신종교
단체
1860년대 초 이후 이운규(李雲圭)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종교들.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남학은 1860년대 초 이후 이운규(李雲圭)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종교들이다. 이운규가 충청남도 연산에서 몇몇 제자를 데리고 새로운 도법을 강학한 것이 창교적 발단이 되었다. 창교 시기와 교리와 동학과 비슷한 듯 다르다 하여 ‘남학’이라 불렸다. 남학의 이상은 이운규가 제시한 후천 세계의 지상낙원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는 후천개벽의 역리(易理)를 인식하고 오음주 수련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운규 사후 제자들에 의해 무극대도, 대종교, 영가무도교, 오방불교, 광화교 등의 분파가 생겨났다. 일제강점기 동학과 남학에 대한 탄압으로 교세가 완전히 위축되었다.

정의
1860년대 초 이후 이운규(李雲圭)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종교들.
설립목적

이 교에서는 현대를 선천시대(先天時代)에서 후천시대(後天時代)로 바뀌는 교역기(交易期)라고 규정하고, 후천시대의 운도(運度)를 천명한 『정역(正易)』이라는 역서(易書)를 제시하여, 후천시대는 극락무궁(極樂無窮)한 지상선경(地上仙境)이 이룩된다.

그렇지만, 이 교역기에는 말세적인 재겁(災劫)이 있기 때문에 이 재겁을 없애고 후천선계의 개벽에 참여할 수 있는 인간 개조의 도법으로서 오음주(五音呪)를 외는 주송수련(呪頌修鍊)을 해야 한다는 오음정의(五音正義)를 주장하였다.

교리로는 유 · 불 · 선 3교가 융섭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이운규의 제자 김항(金恒, 호 一夫)과 이용래(李龍來) · 김치인(金致寅, 호 光華) 등에 의해 교단이 성립될 때, 김항은 유교적인 방향에서 충청남도 연산과 계룡산 일대를 포교하고, 김치인은 불교적인 방향에서 전라북도 운주(雲州)와 진안 운장산(雲長山) 일대에 포교하게 되었다.

이운규가 자신을 찾아와 수학하는 사람들을 가르칠 때는 어떠한 교명(敎名)을 제시한 바도 없고, 교단이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다만 제자들에 의하여 교단이 분립 형성될 때, 무극대도(無極大道) · 대종교(大宗敎) · 영가무도교(詠歌舞蹈敎) · 오방불교(五方佛敎) · 광화교(光華敎) 등의 교명이 붙여졌다.

이 교단이 동학의 발생과 때를 같이하고 교리가 거의 같으면서도 방법이 다르다고 보는 사람들에 의해 동학과 대비된다는 점에서 남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남학의 일부 교단에서는 동학의 갑오의거가 있을 때 이에 준하는 남학의거운동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일까지 있다.

이운규는 이서구(李書九)의 문인으로 1804년(순조 4)에 태어나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을 지냈다. 그는 유교경전은 물론이고 도가서(道家書) 등 제자백가(諸子百家)를 탐독하고 의복(醫卜) · 술수(術數)까지 연구하였다.

특히 천지의 운도와 인세(人世)의 역사적 쇠왕(衰旺)과 교운(敎運)을 살피기 위한 역학연구에 몰두하다가 마침내 선후천 운도가 바뀌는 교역(交易)의 이(理)를 깨닫고 이에 따라 선천 역리를 밝힌 『주역』의 원리가 후천 역리로 바뀐 『정역』의 이치를 구명하기에 이르렀다.

이운규의 이러한 사상은 당시 국가의 운명, 국민의 생활, 윤리적 교육, 민족의 종교가 바로 서지 못하고 극도로 쇠퇴하는 운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새롭게 정립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연원 및 변천

이운규는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의한 새로운 종교를 창도하려는 데 뜻을 두고 서울을 떠나 충청남도 연산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여기에서 몇몇 제자를 데리고 자신이 뜻하는 새로운 도법에 의한 강학을 한 것이 그의 창교적 발단이 되었다. 그의 문인들 가운데 도전(道傳)을 받은 사람은 사돈인 김항, 아들 용래(龍來) · 용신(龍信), 제자 김치인이다.

이 때 이운규가 제시한 선후천 교역운도에 따르는 지상선계(地上仙界)가 개벽된다는 설은 당시 부패된 정치 · 경제 · 교육의 불안한 환경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게 되었다.

오음주를 주송함으로써 심기가 쾌락해지고 질병이 치유된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자연히 하나의 교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김항은 스승 이운규의 역학에 관한 해석을 좀더 깊이 연구한 결과 자가의 독창적인 저서인 『정역』을 찬술하게 되었다. 그래서 김항은 『정역』을 교의의 주축으로 하여 고향인 연산을 중심으로 교단을 형성하였다.

그런가 하면 김치인은 이운규의 두 아들과 함께 용담 대불리에서 이운규를 1세 교주, 이운규의 장남 용래를 2세 교주, 차남 용신을 3세 교주, 김치인 자신을 4세 교주로 하는 교단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김항은 유교적 입장으로 포교하면서 자가의 교단을 ‘무극대도’라고 하였으며, 김치인은 불교적 입장으로 포교하면서 자가의 교단을 ‘오방불교’라고 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김항과 김치인과 더불어 동학의 최제우도 이운규 밑에서 교훈을 받은 바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루는 이운규가 최제우, 김항, 김치인 세 사람을 불러 놓고 최제우과 김치인에게는 각각 선교와 불교를 대표하여 이 세상에 나온 것이니 주문을 외우고 깊이 근신하라고 당부하였다.

또 김항에게는 쇠하여 가는 공부자의 도를 이어 장차 크게 천시(天時)를 받을 것이니 『서전(書傳)』을 많이 읽으라면서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이라는 구절이 담긴 글귀를 내주고 행방을 감추었다고 한다.

그 후 김항은 19년 동안 ‘영동천심월’의 비밀을 풀기 위해 노력하다가 홀연히 깨쳐 허공에서 이른바 ‘정역팔괘도(正易八卦圖)’를 보고 『정역』을 지었다고 한다.

남학의 이상은 후천세계의 지상낙원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는 이운규가 제시한 후천개벽의 역리(易理)를 인식하고 오음의 주송수련을 통해서 가능하다. 『정역』은 이운규의 후천개벽의 역리를 김항이 천명한 이 교단의 경전으로서 후천역(後天易)이라고 부른다.

선천 운수는 해[歲]의 운회(運回)가 365일에 4분의 1이라는 윤(閏)이 있었지만, 『정역』의 운수는 360일 정각이 되니 윤달이 없는 운회라 한다. 그러므로 후천에는 사계(四季) · 주야(晝夜) · 한서(寒暑)의 차이가 없게 되고 인간사회에도 빈부 · 귀천 · 수요의 구별이 없게 된다.

이 때에는 사람의 형상도 달라져서 1만 8,000세까지 장수할 수 있고, 사람은 신명(神明)과 동화되어 조화를 임의로 할 수 있다. 그리고 지상에는 죄고(罪苦)가 없는 지상천국을 이룩하게 된다.

그러나 이 선후천이 교역하는 시기가 되면 삼재팔난(三災八難)이 있게 되며, 인간 행위의 선악에 심판이 따르게 되는데, 이 때를 맞이하여 모든 사람들이 닦아야 될 올바른 도(道)가 곧 남학이 열어 준 무극대도이다.

오음주는 음(吟) · 아(哦) · 어(唹) · 이(咿) · 우(吁)의 오음을 말한다. 이 오음은 궁(宮) · 상(商) · 각(角) · 치(徵) · 우(羽)의 오성(五聲)과 수(水) · 화(火) · 목(木) · 금(金) · 토(土)의 오행(五行) 및 비(脾) · 폐(肺) · 간(肝) · 심(心) · 신(腎)의 오장(五臟)과 조화를 일으키는 음률로, 이를 주송하면 자연히 오기(五氣) · 오장이 수련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음주송은 이에 음률의 고저 · 장단 · 청탁이 있어 서로 조화적으로 자연의 이치에 응하기 때문에 이 영가를 부르면 손발이 저절로 움직여 무도를 하게 된다.

이 영가무도가 극치에 달하면 앉은 채로 몸이 3, 4척이 뛰어오르고 여러 가지 방언(方言), 이보(耳報), 토설(吐說)이라고 불리는 신비현상을 불러 일으키며, 질병이 치유된다고 믿는다.

이것을 오음주송에 의하여 자연의 조화에 부응하는 경지라고 한다. 이 계통의 신자들은 영가무도로 병을 고치고 상제 · 신명을 맞이하여 재앙에서 구원을 얻느는다.

그리고 신화도통(神化道通)하여 화무상제(化无上帝 : 一夫系에서는 一夫의 神明이 上帝가 되었다고 해서 그렇게 부름)의 뜻에 따라 개벽되는 후천 선계에 참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특히 일부계 남학의 교법이며 신행의 전부이다.

이로 말미암아 이 교단을 한때 영가무도교라고 불렀다. 이 영가무도에는 정(精) · 기(氣) · 신(神)의 조화작용이 있다고 믿는다.

정의 조화에 의해 만리(萬理)를 관통하는 것은 유교의 진리라 하고, 신의 조화에 의해 돈오(頓悟)하는 것은 불교의 진리라고 하며, 기의 조화에 의해 수련되는 것은 선교의 진리라고 한다.

정 · 기 · 신의 조화는 모든 심법(心法)에 의한 것이므로 남학은 유교의 존심양성(存心養性)과 불교의 명심견성(明心見性)과 선교의 수심연성(修心鍊性)이 아울러 이룩되는 유 · 불 · 선 3교 합일의 도라고 한다.

다음으로 일부계와 광화계의 대체적인 교리의 차이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남학의 교리를 유 · 불 · 선 3교의 합일로 본 것은 양계가 같으나, 일부계는 유를 주로 하여 불 · 선을 융섭하였으며 광화계는 불을 주로 하여 유 · 선을 융섭하였다. 그리하여 양계가 모두 독특한 혼합적 교리를 만들었다.

둘째, 후천개벽이라는 선후천 교역운도을 논하고 이에 의한 지상천국 이상세계의 전개와 그 희구(希求)를 논함은 양계가 같다.

그런데 일부계에서는 역학적인 원리면에서 후천 운도가 바뀌는 것으로 보아 후천 정역의 운도가 김항에 의해 밝혀졌다고 생각하여 그를 후천개벽의 지도자로 보았다.

그러나 광화계에서는 불교의 당래미륵불교화설(當來彌勒佛敎化說)에 의해 후천개벽을 용화세계의 전개로 보았다. 그래서 광화계는 미륵불의 강림을 교주 김치인으로 보게 되었다.

셋째, 오음주송에 의한 영가무도는 일부 · 광화 양계가 모두 심신을 수련, 묘도(妙道)에 들어가는 묘법으로 삼았다. 이 오음을 외는 것은 일종의 영가이면서도 자연의 이치에 합하고 인간의 정리순화(情理純化)에 신비한 주술적 힘을 발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일부계에서는 오음 이외의 다른 주축(呪祝)을 하는 교파도 있지만 대개는 오음영가를 수련의 기본법으로 한다. 한편, 광화계에서는 오음영가보다 염불 · 진언 · 칠성주(七星呪) 등 각종 주문과 기도문 · 경문 등을 이용한다. 이는 광화계가 오음주송에 의한 수련보다 주축에 더욱 치중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강학(講學)의 문제로 양계가 모두 유교의 도덕과 불교의 전변심법을 주장한다. 그런데 일부계에서는 유도를 주장하면서 수신(修身) · 제가(齊家) · 인의(仁義) · 도덕을 논하는 경전 강학보다는 음양 · 오행 · 역리(특히 正易의 理)의 강학에 한층 더 치중한다.

광화계에서는 불도를 논하면서도 해탈 · 선정을 논하는 강학 · 수도보다는 수신 · 제가 · 충효 등 유교적인 도덕을 강학하는 데 주력한다. 이로써 보면 불과 유를 일체인 것으로 보려 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남학과 동학의 교리를 비교해 볼 때, 후천개벽과 주송수련, 그리고 유 · 불 · 선 3교의 융섭을 내세운 것은 양쪽이 다 같은 주장이다.

그러나 동학의 선후천개벽이론은 주역의 역리에 의한 상원갑(上元甲) · 하원갑(下元甲)의 새 운도 교체를 논한 것인 데 비해 남학은 정역이라는 역리를 제시한 것이었다.

남학의 오음주와 동학의 시천주(侍天呪) · 강신주(降神呪)는 그 내용에 시천주(侍天主)와 오기수련(五氣修鍊)의 뜻이 서로 다르다.

이 두 교단이 모두 유 · 불 · 선 3교의 융섭을 주장했지만, 남학에서는 유교와 불교의 양계 종단이 완전히 갈라지면서도 유의 연원을 중국 고대의 유교에 두었고, 동학은 유를 중심으로 하면서 특히 신유교(新儒敎) 방면에서 취하였다.

그리고 동학의 신앙대상은 인간 자신에 모신 하느님을 신봉하는 것에 비하여, 남학에서는 화무상제와 당래미륵불을 신봉하는 데서 둘의 차이가 나타난다.

김항은 스승인 이운규에게서 받은 도법(道法)이 중국의 고대 유교에 입각하여 새로운 역리를 연구하고 영가무도는 유교의 전통적인 신행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의 교문에 들어오는 교도들은 대부분이 양반계층의 유학자였다.

김항의 교문(敎門)에서 십대 제자로 손꼽히는 김홍현(金洪鉉) · 김영곤(金永坤) · 김정현(金正鉉) · 김정현(金貞鉉) · 김황현(金黃鉉) · 김방현(金邦鉉) 등 족척교인(族戚敎人)과 권종하(權鍾夏) · 이희룡(李熙龍) · 하상역(河相易) 등은 대부분이 충청도에서 이름있는 유학자들이었다.

1898년 김항이 71세로 죽자 하상역이 교통을 받은 2세 교주가 되면서 대종교라는 교명을 내걸고 포교할 때 교리에 대한 새로운 견해와 신행상(信行上)에서도 특이한 신행을 주장하는 예가 있어 이에 대한 시비논쟁이 분분하였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김항의 남학에 대한 신앙태도는 후천개벽 정역이론과 오음수련이 천도(天道)의 예정된 후천개벽을 맞는 정도(正道)를 깨달아 심기(心氣)를 수련하는 공자의 유행(儒行)이라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상역은 『정역』은 김항이 상제의 뜻과 권능에 가름하여 후천개벽 운도를 밝히고 열어 놓은 것이라 하여 김항을 상제로서 신격화하고 본 교의 신앙대상으로 추앙하였다. 그는 김영곤과 함께 윷판의 29점이 배열된 것이 곧 『정역』의 기본 원리라는 주장까지 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홍현과 김정현 등은 김항의 도법은 순수한 유교의 측면에서 연구하고 실천하는 정도인 것을 하상역 등이 신비를 주장하는 사도(邪道)로 타락시킨다 하여 논박함으로써 교리에 대한 분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상역 · 김영곤 등의 신비적 교리에 반대하는 김홍현 · 김정현 · 권종하 등 소위 족척계 제자들은 김항의 교학체계를 공맹의 유학을 새로운 면에서 진작하는 것으로 보고, 남학에서 『정역』을 공부하는 것은 『주역』의 원리에서 후천시대의 새로운 역리가 전개되는 원리를 살펴서 알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오음에 대한 주송은 공자가 주장한 육예(六藝)의 내용에서 시를 읊고 노래를 하면서 무도(舞蹈)를 하는 실사를 행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유행을 진작하면서 부패된 유교윤리를 부흥시켜 인의 도덕이 원만하게 발휘되는 후천의 지상낙원을 개벽하는 주역(主役)이 되자는 것이 남학의 요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실천에 역점을 두는 교인들로 뭉친 일단의 교파가 분립하게 되었다. 이 교파는 김항의 척손들을 중심으로 하는 연산지방의 김씨종문으로 이어졌다.

나중에는 단순한 학회가 아니라 신앙성이 들어 있고 정기적으로 향례까지 지내는 종교적 성격을 갖추게 되었다. 최초로 모임이 시작된 것은 1964년이었다.

이 때 정역학회가 발족되어 초대 회장에 충남대 교수 성주탁(成周鐸)이 선임되어 『정역』 원본을 발간하는 등 정역사상을 연구하기 위한 사업들을 전개하였다. 1976년에는 ‘일부선생기념사업회’가 출범하고, 회장은 김기충(金基沖) 등이 역임하였다.

이 무렵 전 충남대 총장 이정호(李正浩), 성균관전의 백문섭(白汶燮) 등이 참여하여 충남 논산시 양촌면 남산리 당골에 있는 김항의 모역을 가다듬고 묘비(1978년)와 성덕비(1980년)를 건립하였다.

그 후 별다른 활동이 없다가 1994년에 ‘정역사상연구회’가 설립되어 초대 회장에 김용식(金容植)이 취임하였고, 『정역소식』이라는 정기간행물과 각종 연구서들을 발행하고 있다.

1995년에는 묘역 전방에 회관을 신축하였고, 1996년에는 이 묘역 일대를 ‘논산시문화유적지’로 지정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김항이 사망한 지 100주기가 되는 1998년 행사를 위해 1997년 1월에 ‘일부김항선생기념사업회’가 새로 출범하기도 하였다.

한편, 김영곤은 영가무도의 신비력에 의해 도통이 되고 일부상제의 천도 명령에 의한 후천 선계의 개벽에 참여할 수 있다는 교설로써 단체를 만들어 계룡산 등지에서 포교하였다. 그가 죽자 임도봉(林道峯)이 계승했다.

이 교파는 중앙대종교(中央大宗敎)라는 교명으로 이필례(李必禮)에 의해 전라북도 만경에서 널리 퍼져 교주 이필례 여인의 신통한 치병능력으로 한때 1,000여 명의 신도가 모인 적도 있었다.

이필례는 교명을 ‘천일교(天一敎)’로 바꾸고,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쌀 30가마로 밥을 하고 소 2마리, 돼지 2마리를 잡아 제상을 차리는 등 무속에 가까운 종교활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1990년 이필례가 사망하자 교주를 정점으로 행해지던 종교활동은 사실상 중단되었고, 현재는 과거의 신자들과 자손들이 교주의 묘를 참배하는 정도이다.

김항이 죽은 뒤 신도 이희룡이 영가무도 수행을 주로 하는 교단을 만들었다. 이희룡이 죽자, 그 제자 송철화(宋喆和)가 계룡산 국사봉(國師峰)에 수도 장소를 설치하고 『정역』을 연구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설치된 제단에는 일부상제 · 화무상제 · 황극모(黃極母) · 천황(天皇) · 지황(地皇) · 인황(人皇) · 미륵불 등을 모시고 이를 신앙대상으로 하여 기축(祈祝)을 행한다. 여기서의 화무상제와 미륵불은 김항의 화현이라고 본다.

이곳 국사봉은 김항이 마지막 포교의 근거지로 삼았던 유적지가 되어, 여기에서 『정역』을 공부하고 오음주송에 의한 영가무도와 더불어 기타 주축기도 수련을 행하는 일부계 교인들이 현재까지 모이고 있다.

김항의 제자 이상룡(李象龍)이 자기 나름의 교리 · 신행을 주장하면서 포교한 교단이 형성되어 청양 · 공주 · 이천 등지에 그 여세가 남아 있고, 이 밖에도 일부계의 교파에서 동학과 증산교(甑山敎)와 야합된 몇 개의 교파도 형성되었다.

그러나 근래에는 모두 형세가 미약하여 유야무야한 상태이며, 송철화에 의해 시작된 영가무도교는 1976년 송철화가 사망한 이후 교세가 위축되었고, 최근에는 그의 부인이 약 30여 명의 신자들과 함께 국사봉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가끔씩 서울 등지에서 『정역』을 공부하거나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김항의 최후 유적지인 이곳 국사봉을 참배차 방문하기도 한다.

한편, 김치인은 전라북도의 운주와 진안의 운장산 밑, 용담지방 일대에서 포교할 때 전라북도지방의 신도들을 주로 하여 교단을 형성하였다.

그는 이운규의 아들 용래 · 용신 형제를 스승으로 하고 자신이 교주가 되어 오방불교 또는 광화교라는 명칭으로 운장산 밑 대불리(大佛里)에 본부를 두고 포교하였다.

이 오방불교에서는 후천 지상극락의 개벽이 곧 미륵불 출세에 의한 용화세계(龍華世界)의 개벽이라고 하나, 그 교리나 신행 면에서는 『정역』의 운도교역을 믿고 오음주송 수련을 행하면서 도의(道義)를 닦는 것이 유교적 경향이 강하며 신도들도 대부분 유자들이기 때문에 처사교(處士敎)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김치인은 이운규가 제시한 후천개벽이라는 역리적 운도변역(易理的運度變易)을 이교의 종지로 삼았지만 이 운도개벽은 김항과 같이 유교적인 처지에서 선천역(先天易)인 『주역』의 운도가 바뀌는 『정역』의 원리를 제시하기보다는 불교적인 당래불(當來佛) 미륵불의 출세로 인한 용화세계의 개벽운도로 보고 이를 믿게 되었다.

그리고 이 용화세계는 지상선계라고 하여 자신이 포교하는 오방불교의 교법은 곧 유 · 불 · 선이 합일된 무극대도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유교의 인의 도덕과 불교의 자비 선행과 도교의 주축 수련을 병행할 것을 주장하면서, 오음주 등 몇 가지 주축에 의한 기도수련을 병행하였다.

이 때 주축 수련에서 일어나는 영가무도의 신비와 치병 · 도통(道通), 그리고 후천 용화선계에 참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 수많은 교인들이 모여들어 일부계 교단보다도 형세가 큰 교단이 형성되었다. 이 때 교명을 오방불교라고 하는 한편, 자가의 교단을 동학에 대응되는 남학이라고도 하였다.

1894년 동학군의 봉기가년 갑오년 동학군의 거의운동(擧義運動)이 일어나는 것을 본 이 교에서는 자가의 교단에서도 동학과 마찬가지로 후천개벽이 목적이며, 척양척왜(斥洋斥倭) · 보국안민 · 포덕천하(布德天下)를 주장함은 민족종교의 당면한 임무라고 하여 이에 남학에서도 동학과 같은 거의운동에 동참해야 한다면서 이른바 남학운동을 결행하였다.

이 때 교단 본부인 대불리와 주천에 본영을 두고 5만여 명에 달하는 남학군이 조직되었으나, 출동 직전에 관군의 습격으로 간부들과 많은 교인들이 붙잡혀 김치인을 비롯한 8명의 간부들이 전주와 나주에서 사형을 당하고, 남학운동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김치인이 죽자 그 제자들 사이에 교통전수를 둘러싼 분규가 생겼는데, 수제자 김용배(金庸培)가 정통을 이어 금강불교(金剛佛敎)라는 교명으로 포교하고, 김항배(金恒培) · 권순채(權珣采)는 광화교 또는 광화불교라는 교명으로 운주면 가천리와 계룡산 신도안에서 포교하였다.

뒤에 금강불교의 교명이 칠성불교로 바뀌어 대불리와 진안 부귀 등 운장산 주위를 근거로 하고 용담 · 진산 · 금산 · 장수 등지에 포교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기에 일본 경찰의 동학과 남학에 대한 탄압으로 이 교단은 물론이고 일부계의 교인들까지도 다수가 붙잡히는 바람에 교세가 완전히 위축되었다.

현황

광복과 더불어 광화교 · 광화연합회 · 금강불교 · 칠성교, 기타 광화계에서 분파된 몇 개의 교단이 전북 지방에 포교되고 있으나, 지금은 교세가 위축 또는 소멸되어 드러나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

「구한말 남학의 발생과 그 성격에 관하여」(이강오, 『전라문화연구』 창간호, 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79)
『한국신종교실태조사보고서』(김홍철 외,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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