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는 광화(光華)이며, 광제(廣濟)로 개명(改名)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신종교의 하나인 오방불교를 창시하여전라북도와충청남도 지역을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1895년 남학운동에 가담하였다가, 그해 4월 6일 전주 서문 밖에서 처형당하였다.
1855년(철종 6)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주천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가세(家勢)가 곤궁하여 16세에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에 있는 외척 김재영(金載永)에게 의탁되었고, 18세에는 무주군 후령(後領)으로 이거하였다. 이후 전라북도 전주군 묵동과 충청남도 연산군 덕동, 논산군 가야곡면 양촌리 등으로 이주하며 살았다. 27세(1879)에 결혼하여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선야동(仙冶洞)에 집을 짓고 수도에 전념하였다.
어려서부터 향학심이 강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체계적인 유학공부를 할 수 없었다. 독학으로 기본적인 유학의 경전과 술수학을 공부하였고, 도인을 만나 도술을 배우기 위하여 명산대천을 찾아다녔다.
20세(1872)에 진산 태고사에서 부련(夫蓮) 이용래(李龍來)를 만나 제자가 되었지만, 수도한 지 몇 년 후에 스승이 갑자기 떠나고, 이후 29세(1881)에 부련의 아우인 일수(一守) 이복래(李福來)가 찾아와 그를 스승으로 받들었다.
그가 수도하는 선야동에 많은 수의 수도자들이 몰려들자, 34세(1888)에 고향인 용담군 이서면 장등리(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에 도장을 설치하였다.
일수 이복래를 교주로 추대하여 ‘오방불교(五方佛敎)’를 창교하고, 포교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이용래와 이복래는 남학의 창립자인 연담(蓮潭) 이운규(李雲圭, 일명 李雲燮)의 아들이었다.
1894년 동학운동이 일어난 후, 1895년에 그 운동의 여파가 전라북도 전주와 충청남도 지역에 이르자, 김치인의 ‘오방불교’를 비롯한 남학계의 교단에서도 동학과 같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후천개벽의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총궐기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에 진안군 주천에서 수천 명이 집회를 갖고 후천선계의 개벽운도의 기회를 잃지 말자고 주장하며, 황색의 괘자를 입고 오방기를 내세우며 출전하려 하다가 관군이 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하였다. 그는 이러한 남학운동의 거사를 말렸지만, 이 일로 그해 봄 교주 일수와 김치인 및 교도 6명이 관군에게 붙잡혔고, 그 해 4월 6일에 전주 서문 밖에서 처형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