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교에서 분리하여 세운 것으로, 대종교의 초기 명칭이기도 하다. 나철은 1909년 1월 15일에 서울에서 정훈모·오기호(吳基鎬)·이기(李沂) 등과 함께 단군교의 중광식(重光式: 중광은 이미 창시되어 있는 가르침을 거듭 빛낸다는 뜻)을 거행하고 초대 도사교(都司敎)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해인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8월에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었다.
한편, 단군교의 창교 때부터 적극 참여했으며 개명 이후 북부지사교(北部支司敎)의 직책을 맡고 있던 정훈모는 1910년 음력 9월 10일 단군교의 명칭 고수를 명분으로 내걸고 이유형(李裕馨)·유탁(兪鐸)·서창보(徐彰輔) 등과 더불어 나철과 분립하였다. 자신은 도사교로서 임무를 다하면서 당시 정부 각료였던 박영효(朴泳孝)·정두화(鄭斗和)·민병한(閔丙漢) 등을 입교시킴으로써 조선총독부의 공인하에 활발하게 포교활동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1912년 이유형이 교단을 장악하고 정훈모를 축출하였다. 1915년 정훈모는 다시 대종사로 추대되어 양분된 교단을 재정비하였다.
그 뒤 1930년 안순환에 의해 교당인 단성전(檀聖殿)을 시흥에 세워 활발한 포교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서서히 일제의 탄압이 가해지자 1936년 평양지부가 폐쇄되고, 시흥의 총본부도 폐쇄되면서 그 뒤 단군교는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