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류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27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618∼642년이며 영양왕의 이복동생으로 왕위에 올랐다. 재위 초에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하느라 새로 건국된 당과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당에서 도교를 수입하여 진흥시킴으로써 불교에 기반을 둔 귀족세력을 약화시켰다. 신라와는 고토 회복을 위한 공방전을 이어갔다. 당나라가 국내 혼란을 수습하고 동돌궐을 격파하면서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자 천리장성을 수축해 당의 공격에 대비했다. 대당 강경론자이던 연개소문을 제거하려다가 역공을 당해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이름은 건무(建武) 또는 성(成)이다. 영양왕(嬰陽王)의 이복동생으로 영양왕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의 개인적 성품이나 행적 등에 대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통해 대외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그의 정치적 자취만을 엿볼 수 있다.
영류왕(榮留王)의 즉위년(618)에 중국에서는 수(隋)나라를 이어 당(唐)나라가 건국되었다. 고구려로서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함과 동시에, 새로 등장하는 당나라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당나라도 국내의 완전한 통일작업과 민심의 수습, 그리고 돌궐(突厥)의 위협에서 벗어나기까지는 고구려와 평화적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에 양국은 외교사절을 자주 교환하고,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시 사로잡힌 포로들을 622년에 교환하는 등 현실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해나갔다. 이러한 우호적 관계 속에서 624년 당나라로부터 공식적 외교관계를 통해 도교(道敎)가 들어왔고, 다음해에는 사람을 당나라에 보내 불교와 도교를 배워오게 하였다.
영류왕의 즉위 후 고구려에서 불교는 크게 위축되었다. 이는 영류왕이 즉위 이후 영양왕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기존 귀족세력과 연결된 불교세력을 약화시키는 수단으로 도교를 들여와 후원했기 때문이다. 고구려 고승 보덕(普德)의 백제 망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기존 귀족세력과 연결된 불교세력에 대한 견제는 보장왕(寶藏王) 즉위 이후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한편 영류왕의 도교 수입 및 진흥은 노자(老子)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모시고 있던 당나라와의 우호적인 대외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영류왕대의 온건한 대외정책 추진을 대외강경파였던 영양왕대의 신흥 귀족세력들에 대한 견제의 일환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당나라가 국내의 혼란을 수습하고, 나아가서 630년 동돌궐을 격파하고, 640년 고창국(高昌國)을 복속시키면서 양국간에는 점차 긴장이 고조되어갔다. 640년에는 태자인 환권(桓權)을 당나라에 파견하고, 당나라의 국학(國學)에 고구려인의 입학을 요청하는 등 겉으로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당나라는 사절을 파견하여 고구려가 수군(隋軍) 격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경관(京觀)을 파괴한다든지(631), 고구려의 내정과 지리를 정탐하기까지 해(641), 양국의 긴장관계는 점차 고조되어 나갔다.
또한 고구려도 당나라와의 대결이 불가피함을 인식하고, 631년부터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수축하기 시작해 그 뒤 16년간에 걸쳐 완성을 보게 되었다. 당나라와 이 같이 형식적 우호관계를 맺고 있던 고구려는 남으로 잃었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신라와 사투를 계속하였다. 629년 낭비성(娘臂城)을 빼앗기는가 하면, 638년 신라의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하는 등 긴장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같이 대외관계가 긴장된 가운데, 영류왕은 당시 천리장성의 수축을 감독하고 있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을 제거하려다가, 642년 오히려 그의 정변에 의해 몸이 토막 나는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영류왕과 연개소문 간의 알력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왕권을 강화하려던 왕의 의도에 연개소문이 장애가 되었던 듯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대당(對唐) 외교정책 등의 이견도 있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즉 대당온건론을 중시하였던 영류왕이 대당강경론자였던 연개소문과 마찰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