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2년 이전에 설립되어 1457년(세조 3) 이후에 없어진 사찰로 맹인들의 집회소(회관)이다. 맹인들은 명통사를 중심으로 점복교육을 실시하였고, 기우제를 올렸으며, 국가의 안녕을 빌었다. 국가가 정한 음양풍수학 중 음양학(점복업)의 요람으로 맹인 점복인을 양성한 기관이다.
1413년(태종 13) 11월 명통사의 맹인들에게 쌀 30석을 주었고, 1417년(태종 17)에는 선공감에 명하여 명통사를 개수하도록 하고 노비 10명을 주었다. 세종 때에도 명통사에 지원을 계속하였다.
세종은 1427년(세종 9)에 명통사에 쌀 30석과 황두 20석을 주어 부처에게 봉양하고 축복하는 재물로 쓰게 하였으나, 1437년과 1438년에는 흉년이 들어 이를 주지 못하다가 1439년에는 다시 쌀과 콩 20석씩을 지급하였다.
이와 같이 국가에서 명통사를 지원한 것은 국가가 정한 학문인 음양풍수학 중 음양학(陰陽學, 후일 명과학으로 바뀜)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었고, 맹인들이 모여 기우제를 올렸으며, 국혼 때에는 사주팔자를 점쳐 주었다. 또한 왕과 그 가족을 위하여 치병기도를 했으며, 항상 국태민안을 빌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예로는 1420년(세종 2)에 대비가 초학에 걸려 위독할 때, 세종은 맹승 7명을 불러 삼십품도량(三十品道場)을 낙천정 안뜰에 배설하고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였으며, 10일 후에도 다시 도류승(맹승) 14명을 불러 독경하게 하고, 세종도 정성껏 기도한 일이 있었다.
계유정난으로 왕위에 오른 세조는 안평대군 일파를 몰아내고 역도들을 처형한 후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공신들에게 나누어줄 때 안평대군의 책사였던 이현로(李賢老)의 집을 명통사에 주어 오갈 데 없는 맹인들을 수용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국가에서는 맹인 점복인을 양성하고 그들이 단체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명통사의 맹인 지도자는 선초에 벼슬하며 살았는데, 태조와 정종 때에는 유대원(劉大原)이었고, 그 후임으로 맹승 유담(柳湛), 한각운(韓覺云), 정신오(鄭信悟) 등이 있었으며, 세종 때에는 지화(池和)가 대표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