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길흉, 화복을 점치는 점복술과 다른 사람들의 소원에 따라 복을 빌거나 저주하는 독경을 행하였던 맹인 승려이다. 불교의 승려들은 점복업에 종사하는 일이 없는데 반해, 맹승들은 매복업과 독경에 종사했기 때문에 불교의 승려가 아니라, 도교의 도류승(道流僧)이었다.
고려시대에는 복업과(卜業科)와 조선시대에는 명과학(命課學)을 설치하여 맹승들에게 전담하게 하고 그들을 관리로 등용하여 토전(土田)을 주었다. 왕실의 안녕을 위해 점복과 독경을 행하도록 하였다.
고려시대 맹승들의 사회적 신분은 8품 이하의 하급 관리와 승려가 포함된 남반(南班)에 해당되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천인으로 전락되었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면서 숭유억불정책을 국시로 함으로써 맹승들을 천인으로 삼았다. 세조 때부터 맹승들은 명통사와 같은 사찰을 버리고 승려의 옷을 입지 않음으로써 천인의 신분에서 벗어나려 했다.
이때부터 맹인들은 집회소를 절이라 하지 않고 ‘기우제를 올리는 집’으로 불렀고, 후에는 ‘맹청(盲廳)’이라고 했으며, 도교의 경문을 독경하면서도 도류승으로 자처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맹인들이 도가에서 유가로 전향하는 데는 유교의 학문적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즉 사서삼경의 하나이고 유교의 경전 중 가장 난해한 주역은 점복과 깊은 관련이 있다. 맹인들은 주역에 의한 육효점(六爻占)을 침으로써 직업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도가에서 유가로 전향하여 천인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나라에서 맹승이란 집단은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