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에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실명하였다. 1920년에 제생원 맹아부에 입학하여 1923년에 졸업하고 침술업을 하다가 1928년에 동경맹학교 중학부에 입학하였다.
1931년 동경맹학교 고등사범과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았고, 1934년에 동교를 졸업하고 맹학교 교사자격증을 취득한 후 귀국하여 침술업에 종사하였다.
1944년에 제생원 맹아부 교사로 임명되었고, 1954년에 서울맹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맹인 침술제도 부활운동의 여파로 맹학생들의 소요를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1966년 7월 14일 교장직을 물러났다. 이듬해인 1967년 2월 13일 지병의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전태환, 윤백원, 전규동 교사와 함께 여러 차례 협의를 거쳐 제생원 맹아부의 교명을 국립맹아학교로 변경하고, 교육연한을 3년제 소학교에서 6년제 소학교로 늘이는 데에 합의하였다.
1947년 9월 5년제 중학부가 신설되자 침안과(針按科)를 설치하도록 하여 침안(鍼按)교육을 위한 교육과정을 편성하여 교육하였다.
1954년에 교장에 취임한 후 침술과 안마술을 맹학교의 직업교육으로 채택하고, 해부학, 생리학, 병리총론과 각론, 침술학, 안마학, 위생학 등의 교과서를 집필하였고, 사범과를 인가받아 전국의 맹학교 초등부 교사를 양성하는 한편 사범과를 졸업한 제자들을 대학에 진학시켜 중학부와 사범과의 이료 교사를 확보함으로써 맹학교의 직업교육을 발전시켰다.
당시 경제 사정이 어려워 점자교과서를 출판하지 못하고 있을 때 아연판에 교과서를 점역하여 놓고 맹학생들이 직접 자신의 교과서를 인쇄하여 사용하도록 했다. 이때 점자교과서를 점역하는 데 문제점이 많아 1957년에 ‘한국점자연구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새로운 약자, 약어, 문장부호를 수정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또한) 지방의 맹학교 초등부를 졸업한 학생들을 중등부에 입학시켜 교육의 기회를 확대했고, 중도에 실명한 성인 맹인들에게 별과를 설치하여 교육함으로써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59년에는 국립 맹아학교를 서울맹학교와 서울농아학교로 분리하였다.
1964년에는 대학 수준에서 교사를 양성하려는 국가 정책에 따라 사범과를 폐지하고 고등부를 설치하였다. 결과적으로 광복 후 신생 대한민국의 맹교육의 기틀을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