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청 ()

제도
조선 효종(재위 1649~1659) 때 한양에 있었던 맹인들의 집회소.
이칭
이칭
통명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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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효종(재위 1649~1659) 때 한양에 있었던 맹인들의 집회소.
개설

맹청은 맹인들의 집회소로 현재의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 68번지 중부경찰서 근처에 위치하였다. 맹인들은 이 곳에서 명과학교육을 실시하고 단체활동을 하였다.

맹청의 설립

맹인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집회소가 불에 타자, 효종에게 단체활동을 위한 집회소를 마련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효종은 역적으로 처형된 김자점(金自點)의 집을 맹인들에게 주어 맹청을 설립하도록 하였다.

『동국여지비고』에는 “맹청을 ‘통명청’이라 하며, 영희전 담 밖에 있었는데 김자점의 옛 집터이고, 나라에서는 맹청의 책임자에게 ‘지중추(知中樞)’란 직함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맹청의 책임자는 당주(堂主)라는 특별한 직함을 받았다.

맹청의 조직과 운영

맹청은 사제동문(師弟同門)으로 구성되었고, 맹인들 사이에서는 최고책임자를 도상수 또는 도상상수라고 불렀다. 도상수 밑에는 각 문생(門生)을 대표하는 상수회가 있었고, 총무에 해당하는 유사(有司가 있었으며, 그 밑에는 재무를 담당하던 장무가 있었다.

맹청은 크게 좌일방청과 우이방청으로 나뉘고, 좌일방청과 우이방청은 각각 1, 2, 3, 4, 5번 문생청이 있었다. 좌일방청은 양반 출신의 맹인으로, 우이방청은 천인 출신의 맹인으로 구성되었다. 문생청은 한 명의 스승이 중심이 되고 그 제자들로 구성되었는데, 문생청이 성립되려면 최소 8명의 문생이 있어야 한다.

좌일방청과 우이방청의 각 문생들이 교대로 번을 들었으며, 그날 맡은 독경은 자기 문생들에게 먼저 일을 주어 생업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문생청은 맹청의 지휘·감독을 받고 독경을 맡아 일을 나누어 하며, 엄격한 규율을 통하여 단체의 질서를 유지하였다.

마지막 도상수였던 심봉규가 1906년 맹청의 건물을 일본 상인에게 팔아넘김으로써 설립된 지 약 250년 만에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한국 시각장애인의 역사』(임안수,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2010)
『동국여지비고』(제2권, 한성부 사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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