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10월 30일 일본 훈맹점자 30주년 기념식을 마친 후, 제생원 맹아부 학생 노학우와 전태환은 한글점자를 6점점자로 만들기 위하여 교사 박두성에게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한글점자를 창안하는 일은 조선총독부의 조선어말살정책에 위배되었기 때문에 노학우, 왕석보, 전태환, 이종덕 등이 중심이 되어 박두성을 지도교사로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를 조직하고 연구를 시작했으며, 후에 김기환, 이종화, 김영규, 김홍순, 김황봉 등도 참가하였다.
박두성은 한글점자를 창안하기로 하고 조선어점자연구위원들에게 점자를 연구함에 있어 첫째, 점자는 배우기 쉬워야 하고, 둘째, 점의 수가 적어야 하며, 셋째, 서로 혼동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는 목표를 제시하였다.
1920년 11월부터 한글점자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여 1921년 봄에 초안을 만들었고 이를 계속 수정하여 1923년 봄에 완성하였다. 이 점자는 자음을 모두 세 점으로 제자했고, 모음을 모두 두 점으로 제자했기 때문에 ‘3-2점자’라고 했다. ‘3-2점자’는 규칙적이고 체계적이었으며 배우기 쉬웠다. ‘3-2점자’는 초성자음과 종성자음을 다르게 제자하지 않아 초성자음과 종성자음을 구별할 수 없어 한글점자로 채택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조선어점자연구위원들은 다시 연구하기로 하였다.
조선어점자연구위원들은 1923년부터 1926년 8월까지 모두 12개의 안을 제안했고, 이들을 연구∙검토한 후 박두성의 안을 채택하여 ‘훈맹정음(訓盲正音)’이라 하고,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 기념일인 1926년 11월 4일 발표하였다.
박두성과 조선어점자연구위원들은 서울에 사는 맹인들에게는 점자를 직접 가르치고 지방의 맹인들에게는 통신교육을 실시함으로써 훈맹정음의 보급에 힘썼다.
광복 후 사회의 혼란과 6.25동란으로 점자연구위원회의 활동은 자연스럽게 정지되었다. 그러나 점자에 관하여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았으므로 1957년 7월에 서울맹학교 이종덕 교장은 한국점자연구위원회를 발족시켜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를 계승하였다.
그 후 1967년 7월 28일 서울맹학교 전태환 교사를 회장으로 추대하였으나 곧 퇴임하였으므로 다시 한국점자연구위원회의 활동은 정지되었다. 그러다가 1986년 7월 6일 대구대학교 임안수 교수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점자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 결과 1997년 12월 17일 ‘한국점자규정’을 제정∙고시하였고, 2006년 6월 9일에 ‘개정 한국점자규정’을 고시함으로써 점자연구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