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화(池和)는 태종 때부터 단종 때에 걸쳐 벼슬을 살면서 왕의 명을 받아 왕실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치는 것은 물론 왕과 대신 그리고 대신들 사이의 여러 문제를 중재한 맹인 관리였다.
1413년(태종 13)에 한성소윤(漢城少尹)의 벼슬을 받았고, 1436년(세종 18)에는 중훈 검교 첨지내시부사(中訓檢校僉知內侍府事)로 사옹원 사직으로 승진되었다. 국복(國卜)을 담당했고 국혼(國婚) 등에도 참여하였다.
1417년(태종 17) 9월 2일 태종이 딸의 혼사 문제로 지화에게 신랑될 사람의 운수와 팔자를 점치게 하여 전(前) 지춘천군사(知春川郡事) 이속(李續)의 아들을 추천했으나, 이속이 반대하자 왕은 그를 옥에 가두었다. 그 후 태종은 상호군(上護軍)과 대호군(大護軍)들의 아들의 나이를 조사하도록 하여 지화는 윤향(尹向)의 아들의 이름을 써 올렸다. 윤향은 국혼에 찬성하여 귀양에서 풀려났다.
세종의 장인이었던 심온(沈溫)이 병조판서로 있을 때 좌의정 박은이 지화에게 “내가 좌의정을 사직하고 심온을 추천하고자 한다.”고 했고, 지화는 이 사실을 심온에게 알렸을 때, 심온은 지화에게 그렇게 추천하도록 한 일이 있었다.
1444년 12월 7일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이 죽자 세종은 아들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하여 지화에게 점쳐 날을 잡도록 했다. 이 때 지화는 술을 마시고 있으면서 “오늘은 술이 취하여 점칠 수 없다.”고 하자 내시가 임금께 그대로 전하였으므로 세종은 지화를 의금부에 가두고 곧 함경도 회령으로 귀양 보냈다.
세종과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세력 경쟁을 벌리게 되었는데, 수양대군은 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후 지화를 참형에 처했다. 이때 지화의 죄명은 안평대군에게 ‘임금이 될 운세’라고 점을 쳐주어 안평대군과 그의 문객들이 난을 일으킬 뜻을 굳게 했다는 것이었다.
단종실록에 따르면 “지화는 점치는 맹인으로 젊어서부터 길흉을 잘 점쳐 이름을 떨쳤고, 그로 인하여 태종 때부터 궁중에 출입하였다. 또한 대신들도 감히 그를 똑바로 보지 못하여 이로부터 지화의 이름이 무거워졌다. 매양 의심나는 것에 대하여 질문을 받으면 대개는 자기의 뜻으로 화복을 말하여 사람의 마음을 두려워하게도 하고 기뻐하게도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