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포는 1326년(충숙왕 13) 과거에 급제하였다. 얼마 뒤에 예문수찬으로 원나라에 표(表)를 올리러 가다가 마침 원나라에서 귀국 중이던 충숙왕을 배알하게 되어 총애를 받게 되었다. 충혜왕 때에 전리총랑(典理摠郎)에서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가 되었다.
당시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자 상소하였다가 도리어 파면 당하였다. 이때에 어떤 이가 정포가 원나라로 망명하려 한다는 참언을 하여 끝내 울주(蔚州)로 유배당하였다. 유배 중에도 오히려 태연자약하여 활달한 장부의 기질을 잊지 않고 풍류생활을 즐겼다.
정포는 유배지에서 풀리자 다시 출세의 의지를 가지고 원나라에 건너갔다. 원나라 승상인 별가불화(別哥不花, 別哥普化)가 그를 한번 보고 매우 호감을 가지게 되어 원나라 황제에게 추천하였다. 그 뒤에 얼마 안 되어 37세의 나이로 죽었다.
정포는 최해(崔瀣)의 문인으로 이곡(李穀) 등과 사귀며 시문과 글씨에 뛰어난 재질을 보였다. 그의 시집인 『설곡시고(雪谷詩藁)』가 전하고 있고 다수의 시가 수록된 『설곡집(雪谷集)』도 전하므로 구체적인 문학과 사상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현(李齊賢)이 쓴 「설곡시서(雪谷詩序)」에서 정포의 불행하였던 일생에 대하여 애석해하는 글귀들이 나타나는바, 이를 통하여 그의 인물됨과 재식(才識)의 일단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색(李穡)의 「설곡시고서(雪谷詩藁序)」에서 정포의 시를 “맑아도 고고(苦孤)하지 않고, 화려해도 음탕하지 않아, 사기(辭氣)가 우아하고 심원하여 결코 저속한 글자를 하나도 쓰지 않았다” 하여, 높은 수준의 시경(詩境)을 성취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일생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인생체험을 품격 있게 형상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