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언명보(彦明父) 또는 수옹(壽翁). 호는 졸옹(拙翁) 또는 예산농은(猊山農隱). 시호는 문정(文正). 최치원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민부의랑(民部議郎) 백륜(伯倫)이며, 어머니는 대호군(大護軍) 임모(任某)의 딸이다.
최해는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를 거쳐서 예문춘추검열(藝文春秋檢閱)이 되었다.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예문춘추주부로 기용되었다. 장흥고사(長興庫使)에 임명된 뒤에 1320년(충숙왕 7) 안축(安軸)·이연경(李衍京) 등과 함께 원나라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최해만 급제하였다. 1321년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이 되었다. 5개월만에 병을 핑계하고 귀국하였다. 예문응교(藝文應敎)·검교(檢校)·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말년에는 사자갑사(獅子岬寺)의 밭을 빌려서 농사를 지으며 저술에 힘썼다.
최해는 평생을 시주(詩酒)로 벗을 삼았다. 이제현(李齊賢)·민사평(閔思平)과 가까이 사귀었다. 성품이 강직하여 세속에 아부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남의 선악을 밝혔다. 그래서 윗사람의 신망을 사지 못하여 출세에 파란이 많았다. 그는 독서나 창작에 있어서 스스로 깨달음을 중하게 생각하였다. 그가 사제관계를 맺은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고려사』에서 기술하였듯이 그의 성격이 대단히 곧고 깨끗하였음을 보여준다.
최해가 노년에 지은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은 자서전이다. 책 속에서 “구차하게 편함을 추구하지 않고 떳떳이 우졸(愚拙)로 살아가겠노라.”라고 한 것은 ‘졸옹’이라고 자호(自號)한 동기와 같다. 말년에는 저술에 힘써 고려 명현의 명시문을 뽑아 『동인지문(東人之文)』 25권을 편찬하였다. 그가 남긴 문집은 『졸고천백(拙藁千百)』 2책이며, 일본에 존경각(尊經閣)에 소장되어 있다. 『고려명현집(高麗明賢集)』 2집과 『한국문집총간』 3집에 영인되어 있으며, 한국고전번역원에서 2006년에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