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화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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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송악산 자하동에 있었던 고려전기 에 창건된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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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송악산 자하동에 있었던 고려전기 에 창건된 사찰.
내용

930년(태조 13) 8월에 창건하여 안화선원(安和禪院)이라 하였으며, 태조 왕건(王建)의 아우인 왕신(王信)의 원당(願堂)으로 삼았다. 고려 태조의 즉위 초에 고려는 강적인 후백제와 화친을 맺었다. 이때 견훤(甄萱)은 아들 진호(眞虎)를 고려로 보내고, 고려에서는 왕신을 후백제로 보냈다.

그러나 6개월 뒤 진호가 병으로 죽어 고려에서는 시신을 돌려보냈는데, 견훤은 고의로 죽인 것이라고 트집을 잡아 인질로 있던 왕신을 죽였다. 이 때문에 양국 사이에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대규모 전투 후 태조는 억울하게 죽은 왕신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이 절이 국가적 대찰로 면모를 갖춘 것은 1117년(예종 12)이다. 예종이 편액을 송나라에 청하니 휘종(徽宗)이 듣고 어필(御筆)로 불전의 편액을 ‘능인지전(能仁之殿)’이라 쓰고, 송나라 태사(太師) 채경(蔡京)에게 명하여 문의 액자를 ‘정국안화지사(靖國安和之寺)’라고 써서 법전(法殿)에 쓸 재물, 화상(畵像) 등과 함께 보내주었는데, 예종은 신하에게 명하여 문의 액자를 사문(寺門)에 걸게 하였다.

단청과 구조의 아름다움이 당시 제일이었다고 하며 사문에서 어화원(御花園)까지는 약 6, 7리가 되는데, 붉은 언덕, 푸른 뫼뿌리가 가로 벌리고 옆으로 펼쳤으며, 시내가 있어 돌길을 흐르는데 물소리가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또 사면으로는 송백수(松栢樹)가 하늘에 닿았으며, 여름이라도 언제나 가을과 같았다고 한다.

당시의 가람배치는 고려시대 및 우리나라의 사찰구조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안화사문을 들어서면 서편으로 냉천정(冷泉亭)이 있고, 그 북쪽으로 자취문(紫翠門)과 신호문(神護門)이 있었다. 문루의 동쪽으로는 제석상(帝釋像)이, 그 서편으로는 향적당(香積堂)이 있었다.

본전(本殿)은 무량수전(無量壽殿)이고, 본전의 동서로 양화각(陽和閣)과 중화각(重華閣)이 있었다. 그 뒤로 다시 3문이 있었는데 동문인 신한문(神翰門) 속에 능인전(能仁殿)이, 중문인 선법문(善法門) 속에는 선법당(善法堂)이, 서문인 효은원(孝恩院) 속에는 미륵전(彌勒殿)이 있었다. 이 당전(堂殿) 사이에 관음상(觀音像)과 약사상(藥師像)을 모신 전당이 있고, 동쪽으로는 역대 조사들의 화상을, 서쪽으로는 지장탱화(地藏幀畵)를 모셨다.

그러나 송나라의 휘종이 보내왔다는 16나한은 어디에 봉안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이 밖에도 승도(僧徒)들의 객실을 비롯하여 왕이 머무는 재궁(齋宮)이 있는데, 재궁은 심방문(尋芳門)을 지나 응상문(凝祥門)과 향복문(嚮福門) 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그 뒤로는 재운각(齋雲閣)이 있어 항상 맑은 샘물이 솟아나고, 그 뒤에 안화천(安和泉)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화초와 대나무숲, 괴석에 둘러싸인 이 절의 외경(外境)은 병풍 속의 사찰 같은 착각을 들게 할 만큼 화려와 조화의 극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절은 예종 이후 많은 왕가 종친들의 귀의를 받았는데, 특히 예종의 비이며 인종의 어머니인 순덕왕후(順德王后)의 진당(眞堂)을 만든 뒤 왕가의 행향(行香)이 더욱 성행하였다고 한다. 예종이 중창했을 때 이곳의 주지는 원응국사(圓應國師) 학일(學一)이었으며, 즐겨 행향했던 왕은 예종·인종·의종·명종·고종·충렬왕·공민왕 등이었다.

그러나 절은 고려의 멸망 후 동서 약 100칸, 남북 약 40칸의 초석만을 남긴 채 폐사로 남아 있었다. 1930년 옛터에 승려 김만영(金萬永)이 시주를 얻어 다시 중창한 뒤 31본산(本山) 중 전등사(傳燈寺)의 말사가 되었으며, 1989년 복구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파한집(破閑集)』
『역옹패설(櫟翁稗說)』
『전등사본말사지(傳燈寺本末寺誌)』
『북한의 전통사찰』(양사재 편집부, 양사재, 2010)
『북한사찰연구』(사찰문화연구원, 1993)
『한국사찰전서』(권상로 편,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송도의 고적』(고유섭, 열화당, 1977)
집필자
정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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