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文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문한(文翰)의 여러 벼슬을 거쳤다. 문장이 우아하고 수려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송과 요에 보내는 고주(告奏)·표장(表狀) 등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일찍이 거란이 압록강 동쪽 지역에 야심을 가지고 강을 건너와서 동안(東岸)에다 보주(保州: 현, 평안북도 의주)를 설치하여 고려에서 여러 차례 반환을 요청해도 듣지 않다가, 1075년(문종 29) 박인량이 지은 진정표(陳情表)가 요주(遼主)를 감동시켜 철거하게 되었다.
우부승선(右副承宣)을 거쳐 1080년(문종 34)에는 예부시랑으로서 호부상서 유홍(柳洪)과 함께 송나라에서 약재를 보내준 데 대한 사은사로 갔는데, 저장[浙江]에 이르러 태풍을 만나 대부분의 방물(方物)을 잃은 죄로 귀국한 뒤 죄를 받을 뻔하기도 하였다.
1083년(문종 37)에 시강학사(侍講學士)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진사시(進士試)를 주관하여, 음정(陰鼎) 등을 선발하였다.
1089년(선종 6)에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오르고, 이어 우복야(右僕射)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
1095년(숙종 1)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참지정사로 사망하였다.
박인량이 저술한 천독(天牘)·표(表)·장(狀)·시 등은 동행하였던 김근(金覲)의 시문과 함께 『소화집(小華集)』이라는 이름으로 송에서 간행되어 중국에까지 그 문명을 날리었다. 저술로는 『고금록(古今錄)』 10권과 『수이전(殊異傳)』이 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