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1년(예종 16)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왕명을 받아 청연각(淸讌閣)에서 『시경』을 강의하였다.
1122년(인종 즉위년) 시어사(侍御史)로 있을 때, 이자겸(李資謙)과 권세를 놓고 다투던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한안인(韓安仁)이 이자겸에 의하여 죽자 이에 연루되어 유배당하였다. 이자겸이 몰락한 뒤에 소환되어 진주목부사에 임명되었다.
1131년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동경지례사(東京持禮使) 서장관(書狀官) 최봉심(崔逢深)에 의하여 적임이 아니라는 이유로 탄핵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이부시랑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에 발탁되었으나 과거시험 문제를 잘못 출제하여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동인지문사륙(東人之文四六)』에 그가 쓴 2개의 외교문서가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