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직으로 1468년(예종 즉위년) 감찰에 임명되었다. 1479년(성종 10)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1486년(성종 17)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근무하다가, 그 해 우부승지 · 우승지를 역임하였다. 1489년(성종 20) 좌승지로 있다가 같은 해 이조 참의가 되었으며, 이듬해 호조참의가 되었다.
1491년(성종 22) 충청도 관찰사로 천거되었을 때, 장령 이거(李琚) 등이 이계남에게 별다른 공로나 특별한 재능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관찰사 임명에 반대했으나 그대로 임명되었다. 1493년(성종 24)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가 같은 해 한성부 우윤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함경도관찰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 때 어머니가 와병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사임을 요청하였으나, 성종은 충효를 모두 오로지 할 수 없으니 그대로 직책을 수행하라고 명하였다. 1496년(연산군 2) 호조 참판이 되었고 2개월 후에 대사헌이 되었다.
의금부 당상으로 있을 때 연산군이 무죄한 사람에게 벌을 내리도록 요구했으나, 명령을 어기고 무죄로 방면했기 때문에 연산군의 진노를 사서 곤장을 맞기도 하였다.
이듬해 형조참판, 1504년(연산군 10)에 호조 판서가 되었다. 1506년(중종 원년) 중종반정이 있던 날 새벽에 박원종(朴元宗) 등이 군대를 이끌고 대궐로 진군할 때 이계남도 유자광(柳子光) 등과 합류해 반정에 협력하였다. 그 공으로 정국공신 2등에 녹훈되고 평원군(平原君)에 봉해졌다.
물욕이 많고 인색해, 집안의 일상 생활에 쓰는 물건이나 비용을 직접 관여하였다. 공신전(功臣田)을 지급받을 때에도 호조판서라는 직함을 이용해, 근거리의 비옥한 토지를 차지해 주위 사람들의 빈축을 샀다.
그러나 국가재정을 운영하는 데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당시 중국과의 사신 내왕이 잦고 국가에 대상마저 있어 그전의 두 배에 가까운 재정 지출이 요구되었으나, 예산을 적절히 사용해 국가 재정을 건실하게 운용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계남 · 이계동(李季仝) 형제가 문무를 겸비해 모두 고위 관직에 오른 것을 부러워했다고 한다. 1511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