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전기 상서육부(尙書六部) 및 그 속사(屬司)인 고공사(考功司)와 도관(都官) 등의 낭중(郎中)이 개칭된 것이다. 1275년(충렬왕 1) 상서육부가 4사(典理司·軍簿司·版圖司·典法司)로 개편되자, 4사와 고공사·도관에 처음 설치되었다. 정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상서육부의 낭중과 마찬가지로 전리사에 1인, 나머지 2인씩 두어졌을 것이다.
1298년 4사가 6조(銓曹·兵曹·民曹·刑曹·儀曹·工曹)로 개편되면서 낭중으로 개칭되었으나, 같은 해에 4사 체제가 복구됨으로써 다시 정랑이라 불리게 되었다. 1308년에도 4사가 3부(選部·民部·讞部)로 개편되자, 이번에는 직랑(直郎)으로 개칭되었다가 얼마 뒤에 4사가 다시 복구되면서 정랑으로 환원되었다.
1356년(공민왕 5) 문종 관제의 부활과 함께 낭중으로 바뀌어 상서육부·고공사·도관 등에 두어졌다. 1362년 상서육부가 다시 6사(전리사·군부사·판도사·전법사·禮儀司·典工司)로 개편되자, 정랑으로 개칭되어 각 사와 고공사·도관에 설치되었다.
1369년에 또다시 6사가 6부(선부·摠部·민부·理部·禮部·工部)로 개편되면서 직랑으로 고쳐졌으나, 1372년 6사 체제가 복구되면서 다시 정랑으로 되었다. 1389년(공양왕 1)에는 위의 6사가 6조(이조·병조·호조·형조·예조·공조)로 바뀜에 따라 6조의 관직으로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존속해 1392년(태조 1) 새로 제정된 관제에서는 6조 및 도관의 정5품 관직이 되었다. 이 때 정원은 각 조와 도관에 2인씩을 두었고, 이조에만 1인을 두는 대신 고공직랑(考功直郎) 1인을 더 두었다. 그 뒤 정원이 점차 늘어나『경국대전』에 의하면 이조·호조·예조·공조에는 3인, 병조·형조에는 4인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