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위장이라고도 하였다. 위장은 오사(五司)가 오위로 바뀐 1457년(세조 3)에 설치되었으며, 처음에는 한 위(衛)에 한 사람이 각 위를 분담 통솔하였으나『경국대전』상으로는 12인의 문·무관이 겸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기에 오위의 기능이 유명무실하게 되면서 위장도 정3품으로 격하되고 그 수도 1795년(정조 19)에는 15인으로 늘어 났다. 당시는 초기에 없었던 두 사람의 조사위장(曹司衛將)이 있어 사실상 유명무실한 오위의 사무를 주관하였는데, 처음에는 문관으로 임명하였다가, 뒤에 한 사람은 반드시 문관으로 임명하되 또 한 사람은 문음무관(文蔭武官)에서 통차(通差)하였다.
초기의 위장은 오위의 최고 지휘관으로 각 위에 속하여 있는 병종(兵種)을 통괄하고, 입직(入直)·행순(行巡) 및 시위(侍衛)는 물론 진법(陣法)·훈련 등의 최고 지휘 및 통제관으로서의 책임을 졌다. 조선 후기에 오위병제가 혁파됨으로써 관명만 남아 있어 주로 15인의 위장이 순번을 나누어서 입직·순경(巡更)의 책임을 졌다.
이들의 입직을 위하여 외소(外所) 및 남·서·동·북의 5개의 위장소가 있어 한 사람씩 교대로 입직하였으나, 외소는 조사위장이 주관하고 입직소는 금호문(金虎門) 안의 남소, 요금문(曜金門) 안의 서소, 선인문(宣仁門) 안의 동소, 경화문(景化門) 동쪽의 북소였으며 이 위장소를 중심으로 책임구역을 기병 등과 함께 순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