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多包系) 팔작지붕건물. 정전(正殿)에 이르는 출입문으로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 문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처음 창건된 것은 1405년(태종 5)으로 창덕궁의 창건 때 지어졌다.
임진왜란으로 본래의 건물이 불타 없어지자 광해군 즉위년에 창덕궁을 재건하면서 다시 세웠는데, 이 건물도 1744년(영조 20) 인접한 승정원에 불이 나면서 연소되어 좌우행각과 함께 소실되었다가 이듬해인 1745년에 복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낮은 장대석 기단 위에 둥근 초석을 놓고 정면 기단 중앙에 건물 어간(御間)과 같은 너비의 계단을 두었다. 사방에 평주를 돌리고 가운데에 두 개의 고주를 세워 고주 사이에 두 짝의 판문(板門)을 달았었으나, 현재는 개조되어 있다.
공포는 내이출목·외이출목으로 3제공이 중첩되고 도리받침 부재는 구름모양으로 깎았다. 내부는 2제공까지는 첨차 끝이 직각으로 절단되고, 그 위는 둥글둥글한 운궁(雲宮)이 되어 도리와 보를 받치고 있다. 고주 위로 대들보를 얹고 그 위에 종보를 두었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서까래와 가구를 노출시켰다.
지붕에는 양성한 각 마루에 취두·용두·잡상을 두고 용마루의 양성 부분에는 3개의 이화무늬[李花文]를 장식하였다. 인정문의 좌우에는 10칸의 행랑이 뻗쳐 있고, 행랑은 직각으로 북으로 꺾여 인정전 좌우의 월랑과 만나게 되어 있다.
이 중 서쪽의 월랑에는 향실(香室)·내삼청(內三廳)이, 동쪽 행랑에는 관광청·육선루·악기고 등이 있었다. 인정문과 주변 행랑은 일제강점기에 일부 개조가 있어서 인정전 출입문을 외벽 어간에 축소하여 설치하고 창호도 모두 개조하였으며 행랑의 벽체에는 왜식을 가미하였다.
이 건물은 왕위를 이어받는 의식이 거행되던 곳이며, 정전인 인정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위엄과 격식을 가장 잘 간직한 곳으로 중요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