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재실은 능을 수호하고 관리를 담당하는 참봉이 상주하는 곳이며, 제관들의 휴식, 제수 장만, 제기 보관 등의 제사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능의 부속건물이다. 영릉 재실은 안향청, 집사청, 전사청, 참봉청, 행랑, 침가(砧家)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안향청, 집사청(현 제기고), 참봉청(현 재실), 제기고(현 행랑채부속동), 행랑만이 남아 있다.
효종의 능은 본래 경기도 양주군 건원릉(현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서쪽 산기슭인 원릉 자리에 조성되었었다. 1659년 5월 9일산릉도감이 꾸려지고 6개월의 공사를 거쳐 그 해 10월 29일에 산릉의례가 거행되었다. 재실은 7월 27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8월 26일에 상량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산릉을 조성하고 얼마 되지 않아 석물이 벌어지고 현궁까지 물이 침투할 것을 염려하여 1673년에 현재의 위치로 천릉하고 재실도 그대로 이건하였다. 재실은 이듬해인 1674년에 인선왕후를 합장하면서 다시 한 번 자리를 이전하게 되는데 이때 이전된 재실이 현존 재실로 추정된다.
영릉이 초장, 이장, 합장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재실도 1659년에 초창된 후 두 번의 이건과정을 거쳐 현재의 위치에 자리하였다. 영릉 재실은 초창 시 장릉(長陵)의 예를 따랐다. 처음의 모습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673년에 천릉하며 기록한 『효종천봉산릉도감의궤(孝宗薦奉山陵都監儀軌)』를 통해 그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때 재실은 기존의 건물을 철거하여 이건하였다. 재실은 안향청(安香廳), 집사청, 전사청, 참봉청, 행랑, 침가(砧家), 일간문으로 구성되었다. 장릉과 비교해보면 어재실이 안향청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전체 규모와 형식이 일치하고 있어 장릉 재실을 모범삼아 영릉 재실을 건축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재실은 1674년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현종릉과 합사하면서 내청룡 밖에 다시 이건하였다. 이때도 구 재실을 철거하여 이건하였기 때문에 건축의 규모와 형식은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현재 영릉 재실은 안향청, 제기고, 재실, 행랑채 부속동, 행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재실 뒤편으로 낮은 구릉지를 면하고 있어 가로로 길게 안향청, 제기고, 재실이 차례로 배치되고, 그 전면에 길게 대문이 있는 행랑이 자리하고 있다. 1900년경 영릉의 재실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능제규례(陵祭規例)』의 「재실지도(齋室之圖)」와 비교해 보면 현재 재실은 능역을 관리하는 참봉의 거처였던 참봉청이었으며, 제기고라 부르는 건물은 집사청이었다. 현 행랑채 부속동이 제기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례시 왕과 헌관이 머물었던 안향청은 재실 건물 중 가장 격식있는 건물이다. 따라서 주위에 담장을 둘러 영역이 구분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담장이 철거된 상태이다. 또한 안향청 향좌측에는 전사청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영릉재실은 두 번의 이건 과정을 거쳤지만 모두 구 건물을 철거하여 이건함으로써 1659년 초창시의 모습을 대부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전사청과 침가(砧家)가 소실되고 일부 실들의 기능이 변하였지만 안향청(安香廳), 집사청, 참봉청, 행랑, 제기고 등의 배치 구성은 『능제규례(陵祭規例)』의 「재실지도(齋室之圖)」와 일치하고 있다.
영릉 재실은 초창시 장릉의 제도를 따랐다. 의궤의 기록과 『능제규례(陵祭規例)』와 비교해 볼 때 처음 조성되었던 재실의 모습을 대체로 잘 유지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 왕릉의 재실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멸실되고 원형이 훼손되었으나 영릉 재실은 기본 형태가 잘 남아있고, 간결하고 소박하면서 짜임새 있는 건물의 구성은 조선 왕릉의 재실 건축의 표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