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장제 ()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 후기 지방군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설치한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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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영장제는 조선 후기 지방군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설치한 제도이다. 영장(營將)은 속오군 편성체계에서 가장 상급 부대인 영(營)의 장관(長官)으로 속오군이 설치된 1594년부터 존재하였다. 속오군을 효과적으로 조련하고 통솔할 주체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면서 1627년 무신 당산관을 전임 영장으로 파견하였다. 1637년 수령이 영장을 겸하는 겸영장(兼營將)을 운영하였다가 1654년에 다시 전임 영장제도를 시행하였다. 무신 영장을 파견하여 문신 수령들에게서 군사권을 분리함으로써 군사 지휘권이 전문화되었으며 왕권이 강화되었다.

정의
조선 후기 지방군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설치한 제도.
개설

1627년(인조 5) 「영장절목(營將節目)」의 반포와 함께 무신 당상관을 전임 영장으로 파견하여 속오군(束伍軍)의 조련(操鍊)을 담당하게 되었다. 1637년(인조 15) 전임(專任) 영장제가 혁파된 뒤에는 수령이 영장을 겸임하는 겸영장(兼營將) 제도로 운영되었다.

1654년(효종 5)에 「영장사목(營將事目)」을 반포하면서 전임 영장제도가 다시 시행되었다. 효종의 사후에 삼남지방은 전임 영장제로, 그 외 지역은 수령이 영장을 겸임하는 겸영장제로 운영되었다.

내용

영장(營將)은 영(營)-사(司)-초(哨)-기(旗)-대(隊)로 이어지는 속오군 편성체계에 있어서 가장 상급 부대인 영(營)의 장관(長官)이다. 따라서 넓은 의미의 영장제는 속오군이 설치된 1594년(선조 27)부터 존재했다고 볼 수 있지만, 역사적으로 의미를 갖는 영장제는 1627년과 1654년에 시행되었던 전임 영장제를 의미한다.

전임 영장제 이전에는 각 고을의 수령이 그 지역 군병에 대한 통솔권을 장악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창설된 속오군을 효과적으로 조련하고 통솔할 주체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었다. 속오군 자체가 전쟁 당시의 임시 조치로서 창설되었고, 지역별로 편성의 시기나 방법 등이 일률적이지 않았던 탓으로 속오군의 조련에 대한 규정 역시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광해군대(光海君代)에는 각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군병의 조련을 실시하거나, 훈련도감에서 교사가 파견되었다.

인조대(仁祖代)에도 조련을 담당할 주체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는 가운데, 경기도의 경우 비변사에서 담당 당상관을 뽑아 군병 조련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지방군 전체를 아우르는 조련 체계는 성립되지 않았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의 패배는 속오군 조련의 필요성을 공론화하였다. 호란 패배의 원인으로 평소에 조련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결국 이해에 전임 영장제의 시행으로 귀결되었다.

「영장절목」에 따라 각 도(道) 별로 5영을 설치하되, 강원도나 함경도와 같이 군사가 적은 곳은 3~4영을 둘 수 있도록 하였다. 영장으로는 당상관 이상을 파견하였다. 각 고을별로 수령이나 장관(將官)의 지휘 아래 10월 보름 이후 2월 그믐 전까지 각각 군병의 기예를 연마시키는 한편, 같은 기간 동안 영장이 3차례 습진(習陣)을 지휘하였고, 매년 말에 감사(監司)와 병사(兵使)가 같이 모여 5영이 합동으로 한차례 습진하도록 하였다.

1637년(인조 15)에 혁파되었던 전임 영장제는 1654년(효종 5) 3월 「영장사목」의 반포와 함께 다시 시행되었다. 영장의 임무는 진관(鎭管)에 영을 설치하여 주둔하고 각 읍을 순행하면서 시재(試才) · 열무(閱武) · 조련(操鍊)하는 것이었다. 영장의 임기는 24개월이었다.

효종대의 「영장사목」에는 인조대의 「영장사목」보다 영장과 수령과의 직무 한계를 더욱 명백하게 구분하였다. 영장제도는 속오군 조련의 실효를 기하려는 목적 이외에도, 토호(土豪)에 은닉한 민정(民丁)을 찾아내어 군액을 확보하려는 의도도 포함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는 토호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기도 하였다.

「영장사목」에서는 좌수(座首)에게 속오군의 선발 및 군기의 관리 등을 책임 지워 유근착자(有根着者)를 속오군으로 선발하도록 하고 있다. 이 조항은 추후에 강화되어 무근착자(無根着者)나 노잔(老殘)을 뽑으면 감사 · 병사와 영장 · 수령을 연대 처벌하도록 하였다.

변천과 현황

효종의 사후 삼남 지방은 전담 무신의 파견을 원칙으로 하되 그 이외의 지역은 모두 수령의 겸관으로 하는 겸영장제도로 운영되었다. 1746년(영조 22)에 성립된 『속대전(續大典)』을 보면, 경기도 · 황해도 · 함경도 · 평안도의 영장 전원을 수령이 겸임하도록 되어 있다.

강원도의 경우는 3원의 영장 중, 삼척(三陟)에만 전임 영장을 파견하였다. 삼남 지방의 경우, 경상도는 6원 중 4원, 전라도는 5원 중 3원, 충청도는 5원 중 4원의 영장을 전임 영장으로 하고 나머지는 수령이 겸임하도록 하였다.

1700년(숙종 26) 강화(江華)에 설치되었던 진무영(鎭撫營)에도 5원의 영장이 설치되었는데, 모두 관할 지역의 수령이 겸임하도록 되어 있었다. 한편 현종대(顯宗代) 이후 영장은 토포사(討捕使)의 임무를 겸하게 되었다. 1665년(현종 6) 2월, 방어사(防禦使)나 영장을 겸하고 있던 경기도의 수령에게 토포사를 겸하게 한 이후로 11월에는 삼남에 파견된 영장도 토포사를 겸임하게 된다.

의의와 평가

영장제가 실시되면서 조선 후기의 지방군 지휘체제는 조선 전기의 진관체제(鎭管體制)-제승방략체제(制勝方略體制)에서 진영장(鎭營將)과 속오군을 중심으로 한 진영체제(鎭營體制)로 바뀌어갔다.

영장제는 제승방략처럼 특정 지역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의 주요 거점을 몇 개의 영으로 나누어 방어한다는 점에서 진관체제와 유사했다. 다만 영장이 별도로 파견된 경우에는 진관체제의 거진(巨鎭) 즉 대읍(大邑) 위에 영장이 있어, 영장이 대읍을 포함한 소읍의 군사 지휘권을 행사함으로써 진관체제의 거진 수령이 행사한 군사 지휘권을 장악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전임 영장제의 시행으로 무신 영장이 파견된 것은 군사 지휘권의 전문화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수도 있지만, 문신 수령들에게서 군사권을 분리함으로써 왕권의 강화에 기여한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반정(反正)으로 즉위한 인조(仁祖)나,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사후에 그 자리를 계승한 효종(孝宗)의 경우 취약한 왕권을 강화하려는 수단으로서 대외적으로 강경책을 표방하는 한편 대내적으로 군사력을 집중한 측면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속대전(續大典)』
『조선후기 지방군제사』(김우철, 경인문화사, 2001)
『조선후기 지방군제 연구』(서태원, 혜안, 1999)
「조선조 후기의 영장에 대하여」(차문섭, 『사총』12, 고려대학교 사학회,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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