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1년(철종 2) 유흥렴(柳興廉)·채희재(蔡喜載) 등이 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모반을 꾀하다가 고성욱(高成旭)의 고변으로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주모자들은 소현세자(昭顯世子)의 후손인 이명섭을 추대하려 하였다. 이명섭은 압송 과정에서 사망하였고, 나머지 가담자들은 포도청과 추국청에서 조사를 받고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이명섭은 소현세자의 8세손이었다. 소현세자의 후손들은 귀양지에서 사망하거나 각종 모반에 연루되어 희생되었는데, 1728년(영조 4)에는 무신란(戊申亂)에 관련되어 밀풍군(密豐君) 이탄(李坦)이 자진(自盡)하였고, 1755년(영조 31)에는 을해옥사(乙亥獄事)에 관련되어 밀풍군의 두 아들이 연좌되어 교형(絞刑)에 처해졌다. 이때 혈연으로는 밀풍군의 친손이었지만 부친이 출계(出系)되어 계통으로는 종손(從孫)이었던 이원형(李源亨)이 황해도 풍천(豐川)의 초도(椒島)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이원형의 손자인 이명섭도 그대로 초도에 거주하고 있었다. 헌종(憲宗)과 16촌이 될 정도로 혈연적으로 이미 왕실과 멀었던 데다가, 죄인의 후손으로 황해도의 유배지에 있던 이명섭은 모반의 추대 대상이 되기에는 부적합한 존재였다.
그러나 1849년(철종 즉위)에 철종이 즉위하면서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철종은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였는데, 은언군의 가계 또한 대대로 모반에 연루되었다. 철종의 형인 이원경(李元慶)도 1844년(헌종 10) 모반에 관련되어 사사(賜死)되었다. 죄인의 후손이자 친족이었던 철종의 즉위라는 극적인 상황은 소현세자의 후손들에게도 실낱같은 희망이 되었고, 추대 대상을 찾던 변란 주도 세력들에게도 소현세자의 후손들은 상징성이나 가능성에서 충분한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황해도에서의 거사 모의는 1846년(헌종 12)부터 표면화되었다. 문화(文化)에 거주하던 유흥렴은 이해에 재령(載寧)의 기덕우(奇德佑)를 찾아 거병할 뜻을 표명하였다. 1849년 중화(中和) 출신 채희재가 이주하여 유흥렴의 이웃이 되면서 의기투합하였고, 채희재는 1850년(철종 1) 6월, 초도로 이명섭을 찾아가 의사를 타진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미 1849년(철종 즉위) 7월에 평산(平山)의 김응도(金應道)가 이명섭을 찾아와 모반을 권유하였음을 알게 되었고, 이명섭을 통해 주모자들이 연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이들은 참여 세력을 모으며 거사를 준비하였다.
처음 거사는 1850년 10월로 계획되었는데, 인원이 확보되지 않아 연기하였다. 이후 12월, 이듬해 1월 등으로 거사 일은 계속 미루어졌고, 최종적으로 1851년 9월 중순에 거병하기로 하였다가 해주(海州)에서 약국을 경영하던 고성욱(高成旭)의 고변으로 발각되었다. 거사를 준비하며 인원을 확보하느라 5년 정도 지체하는 사이에 거사 사실이 누설될 가능성이 많았으며, 실제로 1850년 6~7월경에는 황해도 지역에 암암리에 거사 소식이 꽤 알려져 있었다.
포도청에서는 9월 10일부터 고변인인 고성욱을 포함하여 체포한 관련자들을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이명섭은 압송하는 과정에서 사망하였고, 주모자 중 유흥렴은 달아나 체포하지 못하였다. 포도청의 조사를 거쳐 10월 초에는 추국청이 설치되었는데, 사건의 처리를 놓고 조정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명률(大明律)』에 따르면, 모반의 경우 공모자도 모두 능지처참(陵遲處斬) 하고, 지정불고(知情不告)의 경우도 참형(斬刑)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소문으로 파다하게 전해진 사건에 지정불고의 형률을 규정대로 적용하자면 수많은 사람을 형장으로 보내야 할 형편이었다. 이에 철종은 사건을 빨리 마무리할 것을 지시하였다. 결국 채희재 등 3명의 주모자만 능지처사(陵遲處死) 하고, 동모의 혐의가 짙었던 구월 산성(九月山城)의 별장(別將) 최치각(崔致珏)은 참형에 처하는 한편, 나머지 동참자들은 모두 귀양을 보내는 선에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정배(定配) 되었던 이명섭의 동생 이명혁(李明赫)은 이후 1853년(철종 4) 한성부에서 있었던 김수정(金守禎)의 모반에서 추대 대상으로 등장하였다.
종실을 추대하는 변란의 성격을 지닌 황해도 모반 사건은 비슷한 시기 다른 변란 사건과 구분되는 몇 가지 특징을 갖는다. 최영(崔瑩)이나 정씨(鄭氏) 진인(眞人)의 출현을 예고하는 등과 같은 민간 신앙적 요소가 나타나지 않고, 소현세자의 후손이라는 이명섭의 상징성이 그것을 대체하였다. 또 17세기 이래 모반 사건에 나타나는 유랑 세력의 존재도 보이지 않고, 황해도 지역의 토착 세력에 의해 진행되었다. 삼정(三政)에 대한 관심도 이러한 토착성의 반영이었다. 분명한 변란의 형태를 지닌 이 사건은 내용적으로는 민란의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