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민중운동을 ‘민란(民亂)’과 ‘변란(變亂)’으로 구분한다. 민란과 비교할 때 변란은 대체로 향촌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한 저항적 지식인이 빈민·유랑민 등을 동원하여 금품 등 대가를 지불하여 거사하며, 대체로 조직적인 무장을 수반하는 병란(兵亂)의 형태를 띤다.
지도부는 특정 고을에 국한되지 않고 각지의 인물로 구성되어 고을 단위를 벗어난 지역 간의 연계를 시도하며, 투쟁 구호도 고을의 폐단을 시정한다거나 이서(吏胥)들을 징치하는 차원을 벗어나 말세의 조짐을 강조하며 왕조를 타도하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성향이 강하다. 또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역성혁명(易姓革命) 사상을 이념적 무기로 왕조의 전복을 의도한 만큼 수령을 살해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렇지만 조선 왕조의 전복을 목표로 하면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려 한다는 점에서 왕조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민중운동을 민란과 변란으로 구분하여 이해하려는 시도는 주로 19세기 사회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에 의해 시도되었다. 조선 사회의 모순을 둘러싼 여러 가지 갈등이 심화되는 것과 함께 각종 민중운동이 빈발하였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1862년(철종 13)의 임술민란(壬戌民亂)과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으로 폭발하는 민중운동을 이해하기 위해 19세기에 나타난 각종 민중운동을 체계적으로 조망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개별적인 차원에서의 초보적인 저항인 ‘유망(流亡)’과 ‘항세 항조(抗稅抗租: 조세 및 지대 납부 거부)’로부터, 집단적인 저항으로 수령에게 직접 민원을 호소하는 정소(呈訴)·등소(等訴), 그리고 명화적(明火賊), 민란·변란 등 다양한 민중운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난리에는 민란과 병란(兵亂)이 있다.”는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에 나타난 바와 같이 민란과 변란이다. 변란은 또 그 저항 수준과 진행 정도에 따라 ‘병란(兵亂)’과 ‘작변(作變)’으로 구분하는데, ‘병란’은 ‘칭병소란(稱兵召亂)’이라 불리던 저항 형태로서, 거사에 성공하여 봉기 형태로 표출된 것을 가리킨다. ‘작변’은 주로 병란을 목표로 준비된 항쟁이 그 모의 단계에서 고변(告變) 등으로 인하여 실행에 옮겨지지 못한 경우를 이른다.
변란 발생의 배경으로는 먼저 정치·사회적 모순의 심화와 그에 따른 저항적 지식인의 활동을 들 수 있다. 반정(反正)으로 즉위한 인조대(仁祖代)에는 재위 기간 내내 크고 작은 변란 사건이 잇달았다. 정권을 위기에 몰아넣은 이괄(李适)의 난을 위시해, 대규모 거사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1629년(인조 7) 이충경(李忠慶), 1646년(인조 24) 안익신(安益信)의 옥사와 같은 병란(兵亂)이 잇달았다.
거사 단계까지 이르지 못한 각종 모반(謀反) 및 이와 관련한 고변(告變)은 더욱 많았다. 정치적 정통성의 결핍이 정권 획득을 위한 변란의 1차적 배경이 된다고 볼 수 있다. 1728년(영조 4)에 일어난 무신란(戊申亂)도 이 범주에서 설명할 수 있다. 아울러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신분질서가 점점 무너지면서 소수의 가문이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정권에서 소외된 대부분의 양반들이 몰락하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현실을 개혁하려는 부류가 증가하면서, 이른바 저항적 지식인으로서 변란의 주도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왕조의 건국 이래 민간 차원에서 정씨(鄭氏)가 일어난다는 참언(讖言)이 있어왔는데, 변란과 결합하면서 점점 구체화되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계기로, 17세기에는 반(反) 왕조적 상징성을 가진 정씨나 최씨 등을 진인으로 내세운 각종 변란이 빈발하였고, 18세기 전반에 이르는 과정에서 진인은 점점 정씨로 귀결되면서 『정감록』으로 수용되었다.
그밖에 미륵신앙을 포함한 반(反) 성리학적 이단 사상들도 변란에 이용되었다. 19세기에 접어들어 이양선(異樣船)이 출몰하고 양이(洋夷)의 침공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면서, 각종 이단 사상과 결부된 변란이 빈발하게 되었다. 19세기의 대표적인 변란으로는 1811년(순조 11)의 홍경래란(洪景來亂), 1869년(고종 6)의 광양란(光陽亂), 1869년부터 1871년(고종 8)까지 이어진 이필제란(李弼濟亂) 등을 들 수 있다.
변란은 항쟁의 조직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민란이 가진 고립, 분산성과 지역적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조직적 기반의 단초를 마련하고 있었다. 변란의 목표가 읍권(邑權)의 탈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중앙 권력을 장악하는 데에 있었다는 점과 함께 전국적 항쟁을 이끌어낼 수 있는 조건을 외형적으로 이미 갖추고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다만 조직의 결속도가 극히 취약했고, 지도부와 참가층의 이해가 일치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대부분의 변란이 거사 단계까지 가지 못하고 중도에 실패한 원인이다.
그동안 민란과 변란의 틀로서 19세기의 민중운동을 설명했던 틀은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 다만 19세기 민중운동을 설명하는 역사적 개념으로서의 그 틀을 조선시대 전체, 나아가 한국사 전개 과정에 있어서의 민중운동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