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경 옥사 ( )

조선시대사
사건
조선 후기 황해 · 강원 · 평안 · 함경도 일원에서 벌어진 이충경의 변란과 관련한 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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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 황해 · 강원 · 평안 · 함경도 일원에서 벌어진 이충경의 변란과 관련한 옥사.
개설

1629년(인조 7) 이충경(李忠慶)이 호란으로 발생한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의 유민들을 끌어들여 반역을 꾀하며 행군하다가 체포되었다. 추국청의 조사를 거쳐, 주모자인 이충경을 비롯한 한성길(韓成吉)·계춘(戒春)·막동(莫同) 등은 처형되고 나머지 관련자들은 유배되었다.

역사적 배경

반정(反正)으로 즉위한 인조대(仁祖代)에는 정통성을 문제 삼는 모반이 계속되었다. 또 1627년(인조 5)에 발생했던 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특히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이 큰 피해를 입어 많은 유민(流民)이 발생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속오군(束伍軍)이 설치되면서, 추가적인 ‘겸역(兼役)’으로 속오군의 군역을 부담하게 된 사천(私賤)들의 저항이 증대되었다. 이에 따른 도망 노비가 대량 발생하고 있었으며, 전문적인 도망 노비의 추적을 위한 추노(推奴) 행위도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경과

황해도 재령(載寧) 출신의 이충경은 충의위(忠義衛)라는 직역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적으로는 호란 과정에서 가족을 잃고 유랑하며 동냥질하던 신세였다. 훈련도감에 군사로 소속시켜준다거나 추노에 참여시켜준다는 등의 구실을 들며, 이충경은 1629년(인조 7) 1월부터 호란 이후 유랑하던 유민들을 가담자로 불러 모았다. 황해도 서흥(瑞興)·수안(遂安)·황주(黃州) 등지로부터 사람들을 불러 모아 신계(新溪)·곡산(谷山)과 강원도 이천(伊川)을 거쳐, 2월 10일 함경도 안변(安邊)의 익곡리(益谷里)로 들어갔다. 이곳의 근거지에서 최영(崔瑩)·남이(南怡) 등의 초상화를 설치한 뒤, 말을 잡아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고 말의 피를 함께 나누어 마셨다.

같은 해 2월 말에 서울에서 거사하겠다는 계획으로 2월 16일 익곡리를 출발하여 가는 과정에 주민의 소[牛]를 탈취하기도 하고, 대장간에서 무기인 편곤(鞭棍)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2월 20일 평강현(平康縣)을 지나다가 일부 가담자가 체포되었고, 그 가운데 김승인(金承仁)이 역모를 고변하였다. 연락을 받은 철원부(鐵原府)에서 2월 21일 이충경 등을 체포하였고, 나머지 관련자들도 각각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추국을 받게 되었다. 철원에서 체포되던 당시 20명 안팎의 가담자들은 모두 전복(戰服)을 착용하고 장검(長劍)을 차고 있었다. 이 밖에 쇠로 만든 편곤, 참나무로 만든 사다리, 나무 몽둥이인 능장 등을 빈 가마니 속에 숨겨 놓고 이동 중이었다.

결과

추국 과정에서 훈련대장 신경진(申景禛) 등이 배후로 지목되었지만, 모두 무고(誣告)로 판명되었다. 2월 30일 이충경은 모반대역(謀反大逆)으로 처형되었다. 20명의 인원으로 서울을 향할 이치가 없다고 판단한 조정에서는 나머지 관련자들을 계속 형신하였지만 더 이상의 배후는 나오지 않았다. 한성길·계춘·막동 등 적극 가담자들은 처형되었고, 나머지 가담자들은 유배되었다.

의의와 평가

이충경의 옥사는 인조 스스로 ‘나무꾼들의 실없는 농담’과 같다며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사건이었다. 이충경 등이 체포되면서 소지하고 있던 문서들도 압수되었는데, 그 문서를 통하여 당시 사회의 모순과 백성들의 바람을 엿볼 수 있다. 모두 20개 조항의 개혁안을 담고 있는 「개국대전(改國大典)」이라는 제목의 문서에서는 군역 및 조세의 공평한 부담 등을 선언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이충경과 그 일행이 추구하던 이상사회의 모습을 소박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조선후기 정치·사회 변동과 추국』(김우철, 경인문화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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