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에 본영을 두고 바다를 지키는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1700년(숙종 26)에 설치되었으나 큰 활동은 없었다. 그러나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이후 외국 선박의 침입이 잦아지자 진무영은 국방상 중요한 군영으로 취급되어 조정에서는 진무영의 지위를 정2품 아문으로 승격시키고 기구를 대폭 강화하였다.
체제는 강화유수가 겸임하는 진무사 밑에 정3품의 중군 1인과 상영대솔군관(上營帶率軍官) 3인, 중영대솔군관(中營帶率軍官) 2인을 두었다. 소관부대로는 종전에 경기수영하에 있던 각 진(鎭)이 이속되었으며, 병력은 포군(砲軍)을 중심으로 하여 3,000여 명에 달하였다.
재정은 사복시의 세납전(稅納錢)을 비롯하여 많은 재원이 할당되었고, 특히 1871년김병학(金炳學)의 건의로 심도포량미(沁都砲糧米)라는 특별세를 제정하여 경비에 충당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진무영의 강화는 일종의 상비방어군을 마련하여 연해지방 수륙군의 병력을 통일된 명령체계하에 조직하고 훈련시키는 동시에 기타 방어시설의 수축과 설치에도 중심적인 구실을 하게 하여 수도방비에 만전을 기하려 한 데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진무영은 1874년에 구제(舊制)로 환원될 때까지 지방군의 중추세력을 이루었고 군력의 충실함은 중앙군을 능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