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에도 훈련원을 중심으로 군사(軍士)의 진법(陣法) 훈련을 위해 마아(麽兒)라는 도상훈련용(圖上訓鍊用) 도구를 사용해 형명(形名)과 진퇴를 익혀왔다. 후기에는 이를 제도화해 무신의 질적인 향상을 꾀하였다.
1629년(인조 7) 1월이귀(李貴)·이서(李曙) 등의 건의로 설치되어, 오위도총부·훈련원의 낭청(郎廳)·내삼청(內三廳)의 금군(禁軍) 및 여러 대장의 군관 등이 모두 학습하도록 하였다.
그 제도는 나무를 깎아 우상(偶像)을 만들어 진세(陣勢)에 배치하고 한 달에 여섯 차례 회좌(會坐)하여 진법을 강의하고, 배운 바에 따라 금군에게는 상사(賞仕)를 지급하고, 그 나머지는 1년을 통계하되 등급을 나누어 시상한다는 것이다. 반면, 불근자(不勤者)는 실직(實職)이면 교체하고, 금군 및 훈련원의 봉사 이하는 그 사일(仕日 : 근무일수)을 삭감하도록 한 것이다.
이같이 설치된 능마아청은 『속대전』에 산직청(散職廳)으로 정비되었다. 관원으로는 당상관 3인이 있었다. 그 중 1인은 훈련원의 도정이 예겸(例兼)했으며, 낭청 4인이 있는데 2인은 훈련원의 습독관이 예겸하도록 하였다. 참외관(參外官)의 임기는 1,350일로, 만료되면 병서를 강송(講誦)하고 자세히 상고해 6품관으로 승급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능마아청은 한 달에 여섯 차례의 능마아강(能麽兒講)을 관장해 무신의 질적인 향상을 도모하였다. 능마아강의 교과서는 『병학지남(兵學指南)』이었다.
1765년(영조 41)에는 군사훈련 기관인 훈련원에 합부(合付)하고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 삼군문의 중군(中軍)이 당상을 예겸하도록 하였다. 낭청 2인은 중인과 서얼 가운데 30세가 된 자를 차출하도록 하였다. 뒤에 다시 예겸하는 낭청 1인은 6품직으로 하되 참외의 전직자를 분별해 임명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