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법 ()

과학기술
개념
천체의 주기적 운행을 시간 단위로 구분하는 계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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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역법은 천체의 주기적 운행을 시간 단위로 구분하는 계산법이다. 지구의 자전과 태양·달의 운행에 맞춰 시간 단위를 정해 나가는 체계를 말하는데 그 단위가 정수배로 딱 들어맞지 않아 다양한 방법이 이용되었다. 역법은 크게 순태음력, 순태음력에 윤달을 끼워넣어 계절의 변화에 맞추려고 한 태음태양력, 태양력으로 나뉜다. 우리나라는 주로 중국의 태음태양력을 도입하여 사용했다. 세종 대에 조선 실정에 맞게 고쳐 『칠정산내편』을 엮었고 1653년부터는 서양역법인 시헌력을 도입했다. 1895년에 고종이 칙령을 내려 태양력을 전격적으로 채택했다.

정의
천체의 주기적 운행을 시간 단위로 구분하는 계산법.
개설

천체의 주기적 현상에 따라 시간 단위를 정해 나가는 체계를 역(曆)이라 하고 역을 편찬하는 원리를 역법이라 한다. 지구의 자전주기는 하루(1일)라는 시간 단위이고, 지구의 공전주기와 달의 삭망주기는 한 해(1년)와 한 달(1월)이다. 이들의 천체운동은 매우 규칙적이고, 모든 사람이 함께 관측할 수 있으며, 또 그 주기는 사람들이 임의로 고쳐 쓸 수 없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 세 주기 사이의 관계가 간단하지 않다는 데 있다. 즉, 1태양년과 1삭망월이 1일의 정수배가 아니라는 점과, 1태양년이 1삭망월의 정수배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 세 주기 중에서 어떤 주기를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순태음력(純太陰曆) · 태음태양력(太陰太陽曆) · 태양력(太陽曆)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들 중에서 태양력 자체도 그 근원을 캐 나가면 모두 태음력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는 태양력에서 1삭망월에 가까운 30일 전후를 한 달로 쓰는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종류

순태음력

계절의 변화와는 관계없이 달의 삭망주기에만 주목하여 만든 역인데, 달의 태양에 대한 상대 위치가 같은 주기를 택한 것이다. 이것을 1삭망월이라 하며 29.530589일이다. 그리고 12삭망월은 1태음년이라 하여 354.36707일이므로 평년을 354일, 윤년을 355일로 한다. 평년 1년은 12삭망월보다 0.36707일이 짧기 때문에 해마다 월상(月相:달의 位相, 月齡에 따라 月面의 빛나는 부분이 변화하는 모양)이 역일(曆日:세월)보다 조금씩 늦어진다. 이 차이를 흡수시키기 위하여 윤년을 두어야 한다. 예를 들면, 30태양년 동안에 11일의 윤일을 더해 주면 월상이 역일에 복귀된다는 뜻이다[(29.530589×12-354)×30=11.012(일)]. 순태음력은 월상에 대한 복귀만을 생각한다면 매우 우수한 역이지만, 계절의 변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계를 붙이지 않았으므로 5, 6월에 눈이 내리기도 하고 1, 2월에 더위로 시달리는 일도 있다. 이리하여 순태음력에서는 약 33.6년에 1년의 차이가 생겨 계절이 순환된다.

회회력

회회력(回回曆)은 현재도 쓰이고 있는 유일한 순태음력이다. 마호메트가 창설한 이 역은 회교력 · 이슬람력 · 마호메트력 등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역으로, 마호메트교도 사이에 사용되고 있다. 이 역에서는 윤달은 전혀 두지 않으므로 계절의 변화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다만 역일을 달의 삭망에 맞추려고 힘썼다. 이를 위하여 30년에 11일의 윤일을 두는 법을 채택하였다. 즉, 홀수 달을 대월(大月), 짝수 달을 소월(小月)로 하고 윤년에는 제12월을 대월로 한다면 30년간의 일수는 1만631일이 되어 360평균 삭망월보다 17분이 짧다. 회회력의 근원은 그리스 천문학에 있다. 이 회회력이 원명시대(元明時代)에 중국에 들어와 많은 영향을 끼치고, 다시 한반도에 들어와서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의 모체가 되었다.

칠정산외편

명나라에서 한반도에 들어온 회회력을 우리 나라에서 약간 간단하게 엮어낸 순태음역법이다. 여기서 칠정(七政)이라는 말은 일월(日月)과 오성(五星)을 말하고, 외편(外篇)이라는 말은 서양식이라는 뜻이다. 『칠정산외편』은 1432년(세종 14)에 왕명에 의하여 이순지(李純之) · 김담(金淡) 등이 회회력을 연구하고 바로잡아서 편찬하여 1442년에 완성하였다. 그 내용은 태양 · 태음 · 교식(交食:일식 · 월식을 관측하는 것) · 오성(五星) · 태음오성능범(太陰五星凌犯)의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방대한 수표(數表:立成)가 많이 수록되어 있으며, 문장은 그 수표를 활용하는 공식집(公式集)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외편에서는 7요(七曜)의 계산법은 도입하지 않았다는 점이 회회력과 다른 점의 하나이다.

태음태양력

순태음력에 29일 또는 30일의 윤달을 간간이 끼워 넣음으로써 계절의 변화에 맞추려고 힘쓴 역법이다. 즉, 이 역법은 달의 위상 변화에 맞추어 가며 태양의 운행에 맞추는 것이므로, 매우 복잡하지만 실용성이 커서 여러 민족이 일찍부터 많이 써왔다. 1태양년은 12.36827삭망월이 되어 12삭망월보다 약 11일이나 길다. 이 나머지 일수가 쌓이면 윤달로 되어 13개월의 1년을 만들기도 한다. 계산에 의하면 8태양년에 3개월, 19태양년에 7개월, 27태양년에 10개월의 윤달을 두어야 역년과 계절이 부합된다. 이것들을 태음태양력의 치윤법(置閏法)에서 각각 8년3윤법, 19년7윤법, 27년10윤법이라고 한다.

예컨대, 19년7윤법에서는 19태양년과 235삭망월(=12월×19+7월)의 길이가 같게 된다는 뜻이다[19태양년=365.2422일×19=6939.6018일, 235삭망월=29.53059×235=6939.6887일]. 이 6,940일을 중국에서는 장(章)이라 하는데 이미 춘추시대 중엽(기원전 600년경)에 발견한 주기이고,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443년경에 아테네의 메톤에 의해 발견되어 메톤주기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만세력에 의하면, 월의 대소는 62태양년을 주기로 하여 보기 좋게 잘 반복됨을 볼 수 있다. 이 62태양년은 거의 767태음월이 된다[(365.2422×62)÷29.53059=766.8326≒767(월)]. 이 중에서 큰달이 407개, 작은달이 360개이다. 그렇게 하면 이 동안의 총 일수와 767삭망월의 일수가 같음을 볼 수 있다[30×407+29×360=2만2650일, 29.53059×767=2만2649.96일]. 만일 62태양년의 총 일수가 2만2650일에 더욱 가까우면 대소월의 반복은 더 대규모로 이루어질 것이다.

태음태양력의 예는 무수히 많다. 바빌론력 · 유태력 · 그리스력 · 인도력 · 중국력 등이 그것이다. 우리 민족이 오래도록 써왔던 태음태양력은 중국력이다. 그 기원은 아주 오랜 옛적이다. 기원전 2000년경에는 춘분 · 추분 · 하지 · 동지가 관측에 의해 정해졌고, 주(周)나라 때에 이미 19년7윤법이 실시되었다. 기원전 104년에 한(漢)나라의 태초력(太初曆)에서 역으로서의 체계가 잡혔고, 그 뒤 중국에서는 청나라의 시헌력(時憲曆)에 이르기까지 수십 회의 개력(改曆)이 이루어졌다. 모든 중국력은 태음태양력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일과 계절과의 차이가 한 달에 가까울 수 있으므로 24기(氣)라는 것을 정하여 계절의 실제적인 시기를 알게 하였다. 24기의 이름은 〈표 1〉과 같이 기온과 기상의 특색 및 이에 따른 생물의 상황에서 따온 것이다.

24기\구분 절기·중기 태양환경
(도)
양력일 누계일
(도)
입춘 정월절 315 2. 4. 44
우수 정월중 330 2. 19. 59
경칩 2월절 345 3. 6. 74
춘분 2월중 0 3. 21. 89
청명 3월절 125 4. 5. 104
곡우 3월중 30 4. 20. 119
입하 4월절 45 5. 6. 135
소만 4월중 60 5. 21. 150
망종 5월절 75 6. 6. 166
하지 5월중 90 6. 21. 181
소서 6월절 105 7. 7. 197
대서 6월중 120 7. 23. 213
입추 7월절 135 8. 8. 229
처서 7월중 150 8. 23. 244
백로 8월절 165 9. 8. 260
추분 8월중 180 9. 23. 275
한로 9월절 195 10. 8. 290
상강 9월중 210 10. 23. 305
입동 10월절 225 11. 7. 320
소설 10월중 240 11. 22. 335
대설 11월절 255 12. 7. 350
동지 11월중 270 12. 22. 0
소한 12월절 285 1. 6. 15
대한 12월중 300 1. 21. 30
〈표 1〉 이십사기

1년 중에서 24기의 입기일시(入氣日時)를 정하는 방법에는 평기법(平氣法)과 정기법(定氣法)의 두 가지가 있다. 평기법은 예로부터 매우 오랜 세월에 걸쳐서 쓰던 방법인데, 1년의 길이를 24등분하여 이것에 절기와 중기(中氣)를 배당한 것이다. 정기법은 황도를 15°간격으로 24등분하여 그 각 등분점을 태양이 통과할 때 한 기씩 배당하는 방법인데, 청나라 때의 시헌력에서부터 채택되었다. 24기는 12절기와 12중기로 되어 있는데, 대체로 음력 한 달에 한 개의 절기와 한 개의 중기가 배당된다. 그러나 절기와 중기를 합한 기간의 평균 길이는 약 30.44일이 되어 삭망주기보다 길다. 따라서 1태음월 안에 중기가 들지 않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런 달을 윤달로 정하고 있다.

태양력

태양의 황도(黃道)상의 운행주기에 기준을 둔 역이다. 지표상에서 관측할 때 태양이 황도상의 춘분점을 떠난 뒤 동으로 이동하여 다시 춘분점에 돌아오는 주기를 취한다. 이 주기를 1태양년 또는 1회기년이라 하며 4계절의 변화와 부합되는 주기인데, 그 값은 365.242196일이다. 이 소수 부분의 값 때문에 태양력에서는 간간이 윤일을 둠으로써 절후(절기)를 역일에 맞추고 있다. 태양력의 예는 고대 이집트력 · 고대 로마력 · 율리우스력 · 그레고리력이다. 중앙아메리카의 마야족이 쓰던 마야력은 일종의 특이한 태양력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태음태양력과 순태음력에도 태양력의 사상이 엄연히 들어 있다는 것이다. 태음태양력과 순태음력은 모두 태음의 삭망에 충실히 따른 역이고, 태양력은 태음의 운행에는 관계없이 태양의 운행에만 따른 역이다. 태음태양력에서는 절월력(節月曆)이, 순태음력에서는 궁월력(宮月曆)이 태양력의 구실을 한다.

절월력

〈표 1〉에서와 같이 중국력의 24기에는 입춘정월절 · 우수정월중 · 경칩2월정 · 춘분2월중과 같이 절기 또는 중기의 이름과 월명(月名)이 함께 적혀 있다. 우리는 절기의 입기일을 절일(節日)이라고 말하고, 하나의 절일부터 다음 달의 절일 전날까지의 한 달을 절월(節月)이라고 말한다. 1태양년은 12절월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이 절일을 월초로 하는 절월력에서는 1태양년이 달의 삭망과는 관계없이 12월절로 구분된다. 실제로 잡절(雜節)에 절분(節分)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원래 철이 바뀐다는 뜻으로 입춘 · 입하 · 입추 · 입동 전날을 말하는 것이었지만, 근래에는 입춘 전날만을 가리키고 있다. 이 날은 겨울의 마지막 날이므로 계절적으로는 연말의 날이다. 민간에서는 이 날 콩을 볶아서 신불(神佛)과 조상에게 바치고 방이나 문에 콩을 뿌려서 마귀를 쫓아내고 복을 받아들여 새해를 맞이하는 풍습이 있다.

궁월력

회회력에는 황도 12궁의 각 궁에 태양이 이동하는 동안의 일수가 적혀 있다. 즉, 백양(白羊) 31일, 금우(金牛) 31일, 음양(陰陽) 31일, 거해(巨蟹) 32일, 사자(獅子) 31일, 쌍녀(雙女) 31일, 천칭(天秤) 30일, 천갈(天蝎) 30일, 인마(人馬) 29일, 보병(寶甁) 30일, 쌍어(雙魚) 30일이 그것이다. 윤년에는 쌍어궁에 1일을 더하여 1년을 366일로 한다. 이에 태양이 각 궁에 머물러 있는 동안을 한 달로 본다면, 이것을 궁월이라고 부를 수 있고, 각 궁의 제1일을 월초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을 궁월력이라 부른다. 절월력과 궁월력은 각각 달의 삭망에 관계없이 천문학적으로 뜻이 뚜렷한 일종의 태양력이다. 이 역이 양성적으로 쓰인 것은 아니지만 태음력 계통의 역에서 이용되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다.

현행의 태양력

현재 쓰고 있는 태양력의 시초는 고대 로마력에 있다고 믿어진다. 고대 로마에서는 1년의 길이가 잘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기원전 750년경 로물루스왕 시대에는 1년을 304일로 하는 10개월제를 썼으며 연초(年初)를 춘분쯤으로 하였다. 즉, 마르티우스(Martius)로 시작하여 31일이 4개월, 그 뒤는 30일이 6개월 계속되어 모두 10개월 304일, 데켐베르(December)로 끝난다. 이들 매달의 이름은 현행 태양력의 월명의 전신이므로 친밀감을 준다. 그 월명은 〈표 2〉와 같다.

달의 이름 이름의 뜻 로물루스역 누마역
Martius 軍神 마르스 31 31
Aprilis 꽃피다 30 29
Maius 성장의 여신 마이아 31 31
Junius 번영의 여신 유노 30 29
Quintilis 제 5월 31 31
Sextiliu 제 6월 30 29
September 제 7월 30 29
October 제 8월 31 31
November 제 9월 30 29
December 제 10월 30 29
Februarius 齋戒의 神 - 28
Januaris 門의 神 - 29
(평년) 304 355
〈표 2〉 고대로마역 (단위: 일)

기원전 710년경, 누마왕 시대에는 페브루알리스(Februaris)와 야누알리스(Januaris)의 두 달을 추가하여 1년을 355일로 고쳤다. 또 기원전 452년에는 페브루알리스와 야누알리스의 순서를 일수와 함께 바꿔 넣기도 하였다. 기원전 304년에는 한 해 걸러서 22일 또는 23일의 윤달을 번갈아 넣어 355일 · 377일 · 355일 · 378일이 반복됨으로써 1태양년을 평균 366.25일로 두었다.

율리우스력

로마력을 대폭 개정하여 만든 최초의 현대식 태양력이다.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집트로 원정을 갔을 때, 그곳의 역법이 간단하고 4계절에 잘 맞음을 알고 개력(改曆)을 서둘렀다. 이 역은 기원전 46년 1월 1일부터 실시되었는데, 평년을 365일로 하고 4년에 1일의 윤일을 두어 1년을 365.25일로 하였다. 이것이 율리우스력이다. 율리우스는 춘분날을 로마의 누마폼필리우스왕 시대와 같이 3월 21일로 하기 위하여 그 전 년에 두 달을 더하여 445일의 1년을 만들었다. 당시의 달의 대소는 1 · 3 · 5 · 7 · 9 · 11월이 31일이고, 나머지 달을 30일로 하되 2월만은 평년을 29일, 윤년을 30일로 정하였다.

그런데 율리우스의 생질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가 로마황제가 되었을 때, 율리우스의 달 율리(July)가 31일인데 비해 자기의 달 아우구스트(August)가 작으므로 이것을 31일로 하고 9월과 11월을 30일, 10월과 12월을 31일로 하였으며, 2월은 평년을 28일, 윤년을 29일로 만들었다. 이것이 율리우스력의 개악(改惡)된 형태이다. 율리우스의 평균 1년은 365.25일이 되므로 실제 태양년과의 차이가 매년 11분 14초가 되어 128년에 1일의 차이가 생긴다〈표 3〉.

월명 율리우스력 그레고리력 세계력
Jan. 31 31 31
Feb. 29(30) 28(29) 30
Mar. 31 31 30
Apr. 30 30 31
Mai.(May) 31 31 30
Jun. 30 30 30(윤일)
Quin.(July) 31 31 31
Sex.(August) 30 31 30
Sept. 31 30 30
Oct. 30 31 31
Nov. 31 30 30
Dec. 30 31 30
연말일 1
평년계 365 365 364+1
윤년계 366 366 365+1
〈표 3〉 율리우스 개력과 세계력 (단위: 일)
*주: ( ) 안은 윤년의 일수.

그레고리력

현행의 태양력을 말한다. 율리우스력에서는 치윤법이 적당하지 않아 역일이 계절에 대하여 점차 어긋나 갔다. 325년 니케아종교회의가 개최된 해는 춘분이 3월 21일로 되고, 1582년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 때는 3월 11로 되었다. 크리스트교에서 율리우스력이 적당하지 않다고 개력을 주장하는 이유는 부활절날을 정하기에 불편하다는 데 있다. 부활절은 크리스트교에서 크리스마스 다음 가는 큰 축제일이다. 따라서 춘분날 자체가 변하면 매우 불편하다. 그러므로 1582년 10월에 그레고리우스 13세는 명령으로, 역면(曆面)에서 10일을 끊어내 버릴 목적으로 10월 4일(목요일) 다음날을 10월 15일(금요일)로 정하고, 다음과 같은 치윤법을 두어 계절에 잘 맞는 역년을 만들었다. 그 치윤법은 서기 연수가 4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는 윤년으로 하고, 그 중 1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는 평년으로 하되, 다만 4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는 윤년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1년의 길이가 365.2425일로 되었다. 이 값은 실제의 평균 태양년 365.2422일보다 약 26초 길다.

그레고리력은 종교적인 대립과도 관련되어 아주 서서히 전세계에 퍼져 나갔다. 이탈리아 · 프랑스 및 그 남쪽의 이베리아반도에서는 개혁 직후부터 실시되었고, 이후 헝가리 · 스위스 등으로 퍼져 갔다. 18세기에 들어서자 독일과 네덜란드의 프로테스탄트교국 전반과 덴마크 · 영국 · 스웨덴으로 옮겨졌다. 동양에서는 19세기 후반부터 사용하게 되었는데 일본(1873), 샴(1889), 한국(1896)의 순으로 실시되고, 중화민국은 20세기 초(1912)에 실시되었다. 이어 소련(1918), 그리스(1924)와 루마니아(1924), 터키(1927) 등의 순으로 퍼져 나갔다.

개력운동

그레고리력은 한 달의 길이가 불규칙하고 역일과 요일이 매년 달라지는 등 결점이 있으므로, 1903년에 독일 사람 폰 지하르트가 제출한 세계력(世界曆)을 널리 보급한 일이 있었다. 이 안(案)은 1 · 4 · 7 · 10월은 31일을 한 달로 하고 이들 달의 제1일은 일요일로 하며, 나머지 달은 전부 30일을 한 달로 한다. 그리고 12월 말에는 연말 휴일을 두어 12월에 속하게 하고, 윤년에는 6월 말에 윤휴일을 두어 6월에 속하게 하여 이 두 날은 모두 부토요일(副土曜日)로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동안 경제 공황과 전란으로 인하여 세계적으로 편안할 사이가 없어 계속 개력할 틈을 얻을 수 없다가, 1956년에 국제연합이사회에서 개력에 대해서는 차후 거론하지 않기로 하였다.

일시의 분할

역에서는 일수와 시간을 적당히 끊어 나가는 방법이 쓰인다. 예컨대, 날짜를 7일씩 끊어 나가기도 한다. 또 역년(曆年)을 60년씩 끊어 나가기도 하며, 180년씩 끊어 나가기도 한다. 하루의 시간도 같은 길이로 끊어 나가는 방법이 잘 쓰이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밤시간을 등분하는 방법도 있다.

보통 7일주를 말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물물교환이나 물건매매를 하기 위하여 일정한 장소를 장터로 정하고 그 부근의 부락인이 모여서 장날을 이루었던 모양이다. 우리 나라에서 장날은 5일 간격으로 서게 되며, 매월 같은 날에 열린다. 이것은 대체로 5일주라고 볼 수 있다. 현행력에서는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의 7일주가 가장 널리 쓰인다.

그 기원은 멀리 칼데아 · 바빌로니아문화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앙아시아의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상류지방에 있던 아시리아에서는 기원전 7세기에 이미 매월 7 · 14 · 21 · 28일에는 쉬었다고 하며, 유다력에서는 제7일은 안식일로 한 듯하다고 한다. 이집트에서는 서기 원년경에 날짜를 7요로 부른 습관이 있었고, 바빌로니아에서도 7요를 역에 사용하였다고 한다. 주가 현재와 같이 확립된 시기는 기원전 1, 2세기 로마력 속에서 잘 알아볼 수 있으며, 7일마다 안식을 취한다는 생각은 유럽의 크리스트교회로 맹렬히 퍼져 나갔다. 325년 니케아종교회의에서 7일주를 그 당시 율리우스력의 매일에 배당하기로 결정함으로써 7요가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인도에서는 5세기경에 서쪽 나라에서 들어왔는데, 7요는 전문적인 역학자 사이에서 겨우 통용되었을 뿐이다. 중국에는 인도의 불교와 천문학을 통하여 7요가 들어왔다. 8세기 초에 번역된 『불설대공작주왕경(佛說大孔雀呪王經)』에는 7요의 순서가 현재와 같게 기록되었고, 당시에 번역된 『구집력(九集曆)』에는 7요가 매일 배당되어 있다. 7요(7일주)는 14세기 말 명나라 홍무 연간(洪武年間)에 번역, 편찬된 『회회력』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그 요일의 순서도 현재의 것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 역에 의존하여 편찬된 『칠정산외편』에서는 7일주에 관하여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

우리 나라에 7일주가 직접적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17세기 초에 북경에서 들어온 천주교 때문이다. 1770년에 홍유한(洪儒漢)은 크리스트교에서 매월 7 · 14 · 21 · 28일에 묵상과 재계(齋戒)를 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는 축제일이 7일 간격으로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같은 시대에 이벽(李蘗)도 그렇게 하였다. 또 이승훈(李承薰)은 주일의 침례(浸禮)를 보았다. 우리 나라에서 7요가 공식적으로 채택된 시기는 19세기 말이다. 『대한제국관보(大韓帝國官報)』에는 1895년 음력 4월 초1일부터 7요가 있다.

일진

나날에 순차로 한 개씩 배당하는 갑(甲) · 을(乙) · 병(丙) · 정(丁) · 무(戊) · 기(己) · 경(庚) · 신(辛) · 임(壬) · 계(癸)의 10간과 자(子) · 축(丑) · 인(寅) · 묘(卯) · 진(辰) · 사(巳) · 오(午) · 미(未) · 신(申) · 유(酉) · 술(戌) · 해(亥)의 12지를 결합해서 만든 ‘갑자 · 을축, 병인, 정묘 …… 임술, 계해’ 등 60개를 말하는데, 60 간지 · 60갑자 또는 육갑(六甲)이라고도 부른다. 중국에서는 간지가 아주 일찍부터 쓰였는데, 갑골문자(甲骨文字)를 통해서 살펴보면, 은(殷, 기원전 1776∼기원전 1123) 이전부터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간지가 역일(曆日)에 잘 쓰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연대기에 매일매일의 각 역일 대신 일진으로 적어 놓았다. 일제 말(1941∼1945)에 음력 사용 억제책으로 총독부에서 발간한 책력에서 음력을 완전히 빼 버린 일이 있었으나, 일진만큼은 순서대로 계속 기재하였다. 이로써 일진이 역일보다 후하게 대접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진과 양력일 사이에는 일정한 관계가 있다. 우선, 간지로 〈표 4〉와 같이 번호를 매긴다.

번호 간지 번호 간지 번호 간지 번호 간지 번호 간지 번호 간지
0 갑자 10 갑술 20 갑신 30 갑오 40 갑진 50 갑인
1 을축 11 을해 21 을유 31 을미 41 을사 51 을묘
2 병인 12 병자 22 병술 32 병신 42 병오 52 병진
3 정묘 13 정축 23 정해 33 정유 43 정미 53 정사
4 무진 14 무인 24 무자 34 무술 44 무신 54 무오
5 기사 15 기묘 25 기축 35 기해 45 기유 55 기미
6 경오 16 경진 26 경인 36 경자 46 경술 56 경신
7 신미 17 신사 27 신묘 37 신축 47 신해 57 신유
8 임신 18 임오 28 임진 38 임인 48 임자 58 임술
9 계유 19 계미 29 계사 39 계묘 49 계축 59 계해
〈표 4〉 간지와 번호

서기 1901년부터 2099년까지 199년 동안 같은 역일에 같은 일진이 돌아오는 주기는 80년이다. 즉, 1901년 1월 1일의 일진이 기묘였는데 1981년과 2061년의 1월 1일도 기묘이다. 이는 매 4년마다 간지번호가 21만큼 전진하기 때문에 80년이 지나면 간지번호가 420만큼 전진하므로 이 값은 60의 7배가 되어 일진이 역일에 복귀된 셈이다. 옛 역법에서는 대개 동짓날의 일진을 구함으로써 역계산의 기초로 삼았다.

간지기년법

갑자년생은 60년 후에 다시 갑자년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61세의 생일을 회갑(回甲) 또는 환갑(還甲)이라 하여 잔치를 베푸는 날로 정하고 있다. 연대를 나타내는 방법으로 단기 또는 서기를 쓰는데, 때에 따라서는 ‘병자년 · 정축년’과 같이 간지로 나타내는 경우가 있으며, 이런 방법을 간지기년법(干支紀年法)이라고 말한다. 간지기년법은 60년을 주기로 하여 같은 간지가 되풀이되므로 오랜 연대에 대해서 적용시킬 수는 없지만, 사람의 연령이나 과거에 경험한 수재(水災) 또는 한재(旱災)를 말할 때 긴요하게 쓰인다.

삼원갑자

이것은 상원(上元) · 중원(中元) · 하원(下元)의 각 갑자년을 말하는데, 그 주기는 180년이다. 옛사람은 일백(一白) · 이흑(二黑) · 삼벽(三碧) · 사록(四綠) · 오황(五黃) · 육백(六白) · 칠적(七赤) · 팔백(八白) · 구자(九紫)의 구성(九星)을 매년매년에 1성씩 배당하여 점술에 이용하였다. 실제로 1984 갑자년은 칠적, 1985 을축년은 육백, 1924 갑자년은 사록, 1864 갑자년은 일백, 1804 갑자년은 다시 칠적이 된다. 물론 이에 배당되어 9성은 9성도(九星圖)에서 중앙성을 대표성으로 쓴 것이다. 중앙성은 9성 모두가 번갈아 들어갈 수 있다. 서기 연수를 180으로 나눈 나머지가 64일 때, 이 해를 중국에서는 상원갑자년이라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가 124년일 때 중원갑자년, 4년일 때는 하원갑자년이다. 삼원갑자(三元甲子)의 주기가 180년인 이유는 9성의 9와 60간지의 60의 최소공배수가 180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와서 우리 나라의 독특한 방법이 사용되었다. 그것은 1444년(세종 26, 갑자년)을 상원갑자로 정했다는 점이다. 이 해는 『칠정산내편』이 간행된 해이고, 역계산방법이 뚜렷해졌던 해이다. 이에 의하면, 우리 나라의 상원갑자년은 중국의 하원갑자년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상원갑자를 우리 나라 독자적으로 설정하여 자주성을 보이기는 했지만, 중국의 문물에 눌려 충분히 활용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시법

하루의 시작은 시대와 민족에 따라 달라졌다. 혹은 해뜰 때 혹은 해질 때 혹은 정오를 일초(日初)로 하였으나, 현재는 세계적으로 한밤중인 야반(夜半)을 하루의 시작으로 정해서 쓰고 있다. 하루의 분할방법도 여러 가지이다. 이집트 사람은 1일을 24시간제로 쓴 최초의 민족이다. 12진법 · 24진법 · 60진법은 인류 문화의 시초부터 있었을 것이다. 또 과거의 오랜 세월에 걸쳐 밤과 낮을 각각 세분하여 썼다. 따라서 시 · 분 · 초의 시간 길이가 계절에 따라, 또 밤낮에 따라 달라지는 부정시법(不定時法)이었다.

우리 나라에서 쓰이던 경점법(更點法)은 일종의 부정시법이다. 즉, 계절에 관계없이 일출 전과 일몰 후의 박명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밤시간을 5등분하여 5경(五更)으로 하고, 각 경을 다시 5점(五點)으로 세분한 부정시법이다. 1469년(예종 1)에 정해진 시보법(時報法)에 의하면, 예컨대 초경3점(初更三點)부터 2경 · 3경 · 4경을 지나 5경3점에 이르는 동안, 북은 경수에 맞추어서, 징은 점수에 맞추어서 다섯 번 치기를 반복하여 밤시간을 알렸다. 이 밖에 초경3점에는 인정(人定)이라 하여 큰 종을 28번 쳐서 통행금지 시각이 되었음을 알렸고, 5경3점에는 파루(罷漏)라 하여 큰 종을 33번 쳐서 통금해제 시각을 알렸다.

그러다가 1884년(고종 21)에 왕명에 의해 오정(午正) · 인정 · 파루에는 금천교(禁川橋)에서 포(砲)를 쏘아서 시각을 알렸다. 1895년에는 인정과 파루 때 종치기를 폐지하고 자정 때 종을 치도록 한 바 있고, 1910년에는 다시 오포(午砲)를 쏘았다. 1945년 미군정이 실시되자 밤 0시부터 4시까지 야간통행금지제도가 실시되었다가 1982년 1월 초순에 전국적으로 이 제도가 폐지되었다.

표준시의 기준이 되는 표준자오선도 간간이 변하였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표준자오선을 동경 120°의 경선으로 하였다가 1910년 4월 1일에는 일본과의 시차를 없애기 위해 우리 나라의 11시를 일본의 12시에 맞추어 정오로 하였다. 이로써 표준자오선이 동경 135°의 경선으로 변한 셈이다. 8 · 15광복이 되자 표준자오선에 대한 이견이 생겼는데, 그것은 동경 135°의 경선이 한반도 훨씬 동쪽에 있어서 표준자오선을 서쪽으로 옮기자는 것이었다. 드디어 대통령령으로 동경 127°30′선을 표준자오선으로 고쳐서 1954년 3월 21일부터 실시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독자적인 표준자오선을 택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불편이 많았으므로, 1961년 8월 10일부터는 다시 동경 135°를 표준자오선으로 하였다. 따라서 표준시는 그리니지 표준시보다 9시간 빠른 것이 되었다.

연호와 기원

연호(年號)는 일반적으로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햇수를 나타내기 위해 붙이는 칭호인데, 정치적 이상이나 나라의 상서로운 현상 혹은 고전(古典) 등에서 이름을 따온다. 연호는 원래 중국의 한나라에서 사용하기 시작하여 우리 나라와 일본 및 월남 등지로 퍼졌다.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연호를 사용한 때는 신라의 536년(법흥왕 23)부터이다. 이리하여 법흥왕 · 진흥왕 · 진평왕 · 선덕여왕 · 진덕여왕의 다섯 왕이 114년 동안 독자적인 연호를 써왔다. 그러나 진덕여왕 3년 당나라의 태종이 제후국에서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것은 부당하다 하여 다음해부터 당나라의 연호 영휘(永徽)를 쓰게 되었다. 신라 말에 궁예(弓裔)가 강원도와 임진강 연안에 세력을 뻗치고 송도에서 왕이라 자칭하며, 마진(摩震) 또는 태봉(泰封)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14년간 독립적인 연호를 썼다는 것은 특이한 현상으로 보인다.

연호는 고려에서도 썼다. 918년 왕건(王建)이 궁예를 몰아내고 등극하여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16년간 썼고, 950∼951년에는 광덕(光德)이라는 연호를 썼으며, 960년부터 4년간은 준풍(峻豊)을 사용하였다. 이들 모든 연호는 사용 도중 중국 연호로 고쳐 쓰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대부분 명나라 또는 청나라의 연호를 썼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 청의 국력이 약해지자, 우리 나라에서는 중국의 연호를 버리고 이 해를 개국(開國) 503년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1896년(고종 33) 태양력이 채택되면서 연호를 건양(建陽)이라 정하고, 당시의 내각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이 이를 공포하였다. 다음해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치고, 1907년 순종이 왕위에 오르자 연호를 융희(隆熙)라 정하였으며, 1910년(융희 4) 경술국치에 이르러 일본 연호를 쓰게 되었다.

연호는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쓴 흔적이 있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등극하자 연호를 영락(永樂)이라고 했다는 사실이 그의 비문에 적혀 있으며, 백제에서도 건흥(建興)이라는 연호가 쓰여 있는 불상이 1913년 충주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보다 훨씬 앞서 신라시대에는 822년(헌덕왕 14)에 김헌창(金憲昌)장안국(長安國)을 세우고 연호를 경원(慶元)이라고 부른 일이 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우리 나라에서는 연호 사용에 있어 많은 제한을 받아 왔으며, 항상 인접 국가의 국세(國勢)에 따라 지배로 받아 왔다. 임금은 각각의 즉위와는 관계없이 나라를 창설했거나 위대한 인물이 탄생하거나 그 밖에 특정된 해를 기점으로 하여, 이것을 기원(紀元)이라고 말한다. 개국 기원은 태조 즉위년인 1392년을 원년이라고 한 것인데,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 결과 중국의 연호를 버리고 이 해를 개국 503년, 다음해를 개국 504년이라고 하여 널리 쓰였다. 1948년 7월 17일에 「대한민국헌법」이 공포되고, 8월 15일에 정부가 수립되자 9월 25일에는 공용 연호를 단군 기원으로 하기로 정하였다. 단군 기원 원년은 기원전 2333년에 해당하고, 또 단기 연수는 서기 연수에 2333년을 더한 값과 같다. 그러나 1950년의 6 · 25전쟁으로 국제교류가 빈번하여 단군 기원을 사용하는 것이 무색하게 되었다. 1961년에는 5 · 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 법률로 1962년 1월 1일부터 서력 기원을 공용 연호로 쓰기로 하였다.

우리나라의 역

한반도에서 쓰인 역은 모두 태음태양력이지만, 문헌에 남아 있는 기록은 너무나 적다. 이들 역은 모두 중국에서 흘러 나왔거나 중국식 사상에서 엮어낸 것이다.

백제와 고구려의 역

신라 · 고구려 · 백제의 건국은 대체로 기원전 1세기이고, 중국의 한대(漢代)이며 로마에서는 율리우스력을 채택한 시기였다. 백제는 3세기 이후 일본에 한자(漢字)를 알리고 불교를 전해주는 등 일본 고대 문화의 기틀을 만들어 주었다. 특히, 554년(위덕왕 1)에는 역박사(曆博士)를, 602년(무왕 3)에는 관륵(觀勒)이 역본(曆本)과 천문지리서를 일본에 보냈고, 일본에서는 604년부터 원가력(元嘉曆)을 썼다. 이런 사실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기록되어 있다. 『후주서(後周書)』와 『수서(隋書)』에도 백제에서 원가력을 썼다는 것이 명기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기록으로 보아 백제는 원가력을 채택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역법은 원래 445년에 송나라에서 채택되어 65년간 계속되었는데, 백제에서도 이와 동시에 채택하여 200여 년간 사용하였다. 원가력은 평삭법(平朔法)과 평기법을 썼고, 우수(雨水)를 기수(氣首)로 하였으며 19년7윤법을 채택하였다. 원가력의 역일은 1972년 7월에 공주에서 발굴된 무령왕릉의 지석(誌石:죽은 사람의 이름, 행적 등을 적어 무덤 앞에 놓는 돌)에 적혀 있다.

고구려에서 쓰인 역이 무엇이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특히, 초기의 역에 대하여는 더욱 그렇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하면, 624년에 고구려 왕이 중국에 사신을 보내 역서를 나누어 가져갔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에서는 이미 619년에 부인균(傅仁均)이 무인력(戊寅曆)을 지어서 고조(高祖)에게 바쳤으며, 그 뒤 665년(인덕 2)에 인덕력(麟德曆)이 채택되었다. 그러므로 고구려에 들어온 역은 무인력일 수밖에 없다. 이 역에서는 정삭법(定朔法)을 처음으로 채택하였다. 이 정삭법이 평삭법보다 더 정밀하기는 하지만, 큰달이 네 번이나 연거푸 일어난다 하여 잠시 폐기되었다가, 약간 수정하여 인덕력 이후부터 다시 썼다.

신라의 역

신라는 국초부터 역을 썼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 법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앞에서 말한 무인력은 당나라에서 619년부터 46년간 사용하였다. 시일이 지날수록 실제 경우와는 점점 맞지 않게 되므로 이순풍(李淳風)이 갑자원력(甲子元曆)을 지어 올렸다. 당나라 고종이 태사(太史)에게 명하여 665년(인덕 2)부터 이 역을 쓰게 하였는데, 이것이 인덕력이다. 인덕력은 728년(開元 16년)까지 당나라에서 64년간 사용된 역법인데, 이 역법에서는 무인력에 이어 정삭법을 채택하였고 세차(歲差)를 취하지 않았지만 장주기(章週期)를 전부 폐기한 것이 특징이다. 이후의 역법은 모두 정삭의 날을 매월 초1일로 하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인 674년(문무왕 14)에 대나마 복덕(福德)이 당나라에 들어가 역술(曆術)을 배워 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 해는 인덕력이 반포된 지 9년 후이므로 이때 들어온 역은 인덕력이 틀림없을 것이다. 통일신라시대는 7세기 후반부터 10세기 초에 이르는 약 250년간이다. 이 동안에 당나라에서는 선명력(宣明曆) · 인덕력 등 7종의 역이 번갈아 채택되었는데, 그 중 선명력은 822년부터 71년간 당나라에서 사용하였다.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자주 보내어 국교가 빈번한 때였으므로 830년경에는 신라에서도 선명력이 쓰였을 것이다. 선명력은 중국에서 822년 이래 71년간이나 사용되었으며, 한반도에서는 신라에 이어 고려의 충선왕에 이르는 근 500년간 채택되었다. 선명력에서는 태음 시차를 고려하여 일월식의 계산에 약간의 진보는 있었다고 하지만 별다른 창안은 없었다.

고려의 역

고려에서는 태조 이래 당나라의 선명력을 이어받아 썼을 뿐, 따로 새로운 역을 만들어 쓰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1281년(충렬왕 7)에 원나라 사신 왕통(王通)이 수시력(授時曆)을 가지고 와서 이 역법의 취지를 설명한 조서(詔書)를 읽어 주었던 일이 있었다. 선명력은 822년부터 중국에서 채택한 것으로 태조 왕건이 건국(918년)할 때까지 거의 100년이나 지났으므로, 그 술법에 차이가 생겨 당나라에서는 이미 여러 차례 개력하였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이전대로 선명력을 계속 사용하다가 1309년(충선왕 1)에 최성지(崔誠之)가 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서 수시력을 얻어 와 연구하였다. 그러나 일월식에 관해서는 계산방법을 모르므로 이 계산만은 선명력의 옛 방법을 따라 썼다.

원래 원나라에서 쓰던 대명력(大明曆)이 천행과 맞지 않아 개력하지 않을 수 없어 1276년(지원 13)부터 5년간의 준비기간을 두고 천문관측을 정밀히 한 후 수시력을 편찬하였다. 이 역은 가장 좋은 순 중국류의 역법인데, 1281년 이후 350년(대통력 포함)이나 중국에서 계속 쓰였다. 수시력은 명대에 와서 극히 미미한 수정을 거쳐 대통력(大統曆)이라는 이름으로 발간되었다. 수시력에서는 적년(積年:여러 해)과 일법(日法)을 폐지한 다음, 세실소장법(歲實消長法)을 채택하고, 정밀한 관측과 특별한 산법에 의하여 역을 편찬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내부에서 새로운 역을 구성했던 듯하다. 이미 1052년(문종 6)에는 태사 김성택(金成澤)에게 명하여 십정력(十精曆)을 만들게 하였고, 이인현(李仁顯)에게는 칠요력(七曜曆)을, 한위행(韓爲行)에게는 견행력(見行曆)을, 양원호(梁元虎)에게는 둔갑력(遁甲曆)을, 김정(金正)에게는 태일력(太一曆)을 만들게 하였으나, 이들의 역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지금의 천세력(千歲曆)이나 칠정력(七政曆)의 초기 작품인 듯 생각된다.

고려 말 조선 초의 역: 대통력의 채택

고려 말 이후 조선시대에 걸쳐 한반도에서 강력하게 쓰인 역은 대통력이다. 명나라에서 대통력이 반포된 것은 1368년(洪武 元年)인데, 이 해는 국호를 명이라고 부른 해이다. 이 역은 이름만 다를 뿐 실은 수시력을 답습한 것이다. 따라서 1384년(홍무 17)에 누각박사(漏刻博士) 원통(元統)이 명나라의 새로운 역법을 제정해야 할 것을 진언하였던바, 이 말이 받아들여지기는 했지만 근본적인 변혁은 없었고 겨우 홍무 17년을 역원(曆元)으로 고쳐 정하고, 1년 태양년의 길이가 불변한다는 설을 도입하였을 뿐이다. 1370년(공민왕 19)에 우리 나라의 사신으로 갔던 성준득(成准得)이 대통력을 가져와서 실시하였고, 이후에도 해마다 명나라에서 역서를 가져왔다.

그러나 수시력은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지 않는 바가 있어 세종시대에 『칠정산내편』을 엮어냈다. 여하튼 수시력의 명맥은 대통력 시대까지 합쳐서 중국에서는 1280년부터 368년간이나 계속되었고, 한반도에서는 1309년부터 1653년까지 344년간이나 쓰였다. 『칠정산내편』에 대하여 간략하게 말하면, 고려 충선왕 때 수시력을 도입했지만 역관(曆官)들은 일월식과 오성 운행에 관해서는 해득하지 못하였다. 1432년 세종은 정흠지(鄭欽之) · 정초(鄭招) · 정인지(鄭麟趾) 등에게 명하여 이들의 이치를 구명하고 새로운 관측과 문헌조사를 기초로 하여 1442년에 『칠정산내편』을 엮어냈다. 여기서 ‘내편’은 중국식이라는 뜻이므로 ‘칠정산내편’은 일월과 오성의 운행을 중국식으로 추산한다는 뜻이다.

앞에 말한 학자들에게는 역리(曆理)를 구명하게 하고, 만일 자세히 구명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세종이 친히 판단을 내려 의문이 풀리도록 하였다. 또 『태음통궤(太陰通軌)』『태양통궤』를 중국으로부터 얻어 왔는데, 그 방법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므로 이를 바로잡았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수시력과 대통력은 북경에서 관측한 결과를 사용하였으므로 서울에서의 값과는 달랐다. 예컨대, 경도와 위도, 일출입 시각, 밤낮의 길이 등이 그것이다.

『칠정산내편』은 이들의 값을 우리 나라 실정에 맞게 고쳐 놓은 것이므로 조선시대 역서의 뼈대가 되었다. 전체가 3권 3책으로 되어 있으며, 권두에 천문 상수가 적혀 있고, 다음에는 역일(曆日) · 태양 · 태음 · 중성(中星) · 교식 · 오성 · 4여성(四餘星)의 일곱 장이 들어 있으며, 권말에 동지 후와 하지 후의 일출입 시각과 밤낮 길이의 시간이 적혀 있다. 그 문장으로 보아, 대부분이 수시력과 대통력의 문장을 그대로 옮겨 썼거나 약간의 변경을 한 것이 많다. 자기(紫氣) · 월패(月孛) · 나후(羅睺:별의 이름) · 계도(計都:중국 九曜星의 하나로, 묘수에 있는 별) 등 4여성은 수시력에는 없고 대통력에만 있는 것인데, 순수과학적으로 엮은 『칠정산내편』에 점술과 관계 있는 가상적 천체 4여성을 삽입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곤란하다.

조선의 역: 시헌력의 도입

대통역법으로는 일월식의 추산이 맞지 않는다 하여, 15세기 말부터 중국에서 개력의 여론이 대두되던 중 1600년에는 리치(Ricci,M.)의 북경 주재가 허락되어 선교사에 의한 서양 역법을 접하게 되었다. 1644년(인조 22)에 우리 나라의 김육(金堉)은 북경에서 시헌력이 실시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법을 배우기 위해 1646년에 사신으로 연경에 들어갔다. 거기서 샬(Shall,A., 湯若望)에게 배우려 하였으나 잘 가르쳐 주지 않자, 다만 책을 사가지고 돌아와서 관상감관 김상범(金尙范) 등에게 열심히 연구시켰다. 그렇게 해도 완전히 이해되지 않아 1651년(효종 2)에 다시 중국에 들어가서 흠천감(欽天監)에게 뇌물을 주고 새 역법을 배워 오게 하였다. 그 결과, 마침내 효종 4년부터 시헌력을 쓰게 하였다. 이 시헌역법은 서양식 계산법을 썼고, 1태양년의 길이를 365.2422일 또는 365.2423일로 정하여 지금까지의 모든 역에서 쓰던 값보다 더 정확한 값을 썼다.

조선 말 이후의 역: 태양력의 채택

조선 말기까지 쓰였던 시헌력은 서양에서 들어온 역법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태양역법이 아니고 태음태양역법이다. 그러나 이 역법을 계속 쓰고 있을 수 없을 만큼 국제정세가 변하였다. 1876년(고종 13)에는 한일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일본과의 왕래가 잦았고, 1882년에는 미국과 조약을 맺었으며, 다음해에는 영국 · 독일과도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러시아 · 벨기에와, 1884년에는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하였다. 1879년에는 원산항, 1883년에는 부산항을 개항하여 외국의 선박이 드나들게 하였다.

이 시기는 러시아와 중국을 제외한 여러 나라가 태양력을 썼을 때였다. 이리하여 고종황제의 조칙(詔勅)에 의해 개국 504년 11월 17일(음력)을 1896년(고종 33, 개국 505) 1월 1일로 하고, 이 날부터 태양력을 채택하게 하고 연호를 건양이라 정하였다. 태양력에 관한 조칙이 내리자 당시의 관청과 궁중에서는 모두 태양력을 썼다. 그런데 궁중에서도 선왕에 대한 삭망제와 탄신 축하에 대해서는 매우 어색한 점이 있었는지, 1년도 안 되어 다시 이들 행사는 시헌력에 따르기로 하였다.

우리나라 역서의 변천

현재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옛 역서는 대통력 · 시헌력 · 명시력 · 조선민력 · 약력 등의 이름으로 발간된 것들이다. 이들은 모두 조선시대 이후의 것이다. 이것들을 역서의 이름에 따라 시대별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대통력시대(1370∼1652)

대통력(大統曆)의 부분적인 모습은 경상북도 안동군 하회동의 유성룡(柳成龍) 서재에서 볼 수 있다. 이것들은 임진왜란 때의 역 중 수년간의 것을 보관해 둔 것인데, 역서의 크기가 월등히 크다. 대체로 1598년(선조 31) 이전의 것은 40.7×17.8㎝, 그 뒤의 것은 39.1×17.8㎝의 두 종류로 되어 있다. 그리고 뒤의 것은 대명만력(大明萬曆)이라는 중국 연호를 사용했지만, 앞의 것은 연호는 쓰지 않고 간지기년법으로 표시되어 있다. 앞에서 말한 1598년은 임진왜란이 끝나는 해인데, 이 해의 끝을 경계로 역서의 외모가 달라진 데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역주(曆註)가 풍부하게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월주(月註)에는 입기 시각이나 기후의 특징이 적혀 있고, 일주(日註)에는 일진 · 납음(納音:12율에 각각 있는 궁 · 상 · 각 · 치 · 우의 5음을 60갑자에 배정하여 五行으로 나타낸 것) · 직(直) · 수(宿) 및 각종 의(宜) · 불의(不宜) 등이 기재되어 있으며, 간혹 일출입 시각과 밤낮의 길이가 적혀 있다.

시헌력시대(1653∼1895)

1653년(효종 4)에 김육의 노고와 김상범의 열렬한 연구의 결실로 채택된 것이 시헌역법(時憲曆法)이다. 그 크기는 30.8×16.8㎝와 29.3×15.9㎝의 것이 발견되었다. 앞의 것은 ‘대청광서18년시헌서(大淸光緖十八年時憲書)’ · ‘대청동치10년시헌서(大淸同治十年時憲書)’라고 중국의 국호와 연호가 붙어 있으므로 겉보기에는 중국에서 만든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권말에는 조선시대의 관리 이름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 시헌서는 우리 나라에서 출판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시헌역법에 따라 만든 역서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그 하나는 시헌력이고 다른 하나는 시헌서이다. 원래 시헌력이라고 불러야 하지만, 시헌서라고 쓰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청나라 건륭황제(乾隆皇帝)의 이름인 홍력(弘曆)의 역이라는 글자를 피하기 위함이다. 건륭황제의 즉위는 1736년이므로 효종 이후 약 80년 동안은 시헌력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19세기에서 시헌력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시헌력이라고 부른 해는 1896년과 1897년의 2년뿐이다.

1894∼1895년간 2년에 걸친 청일전쟁에서 청나라의 패배로 우리 나라가 완전 독립국가로 인정되자, 역서에서도 시헌력이라는 본래의 이름을 썼으며, 우리 나라의 국호를 넣어서 ‘대조선개국505년시헌력(大朝鮮開國五百五年時憲曆)’(1896), ‘대조선건양2년시헌력(大朝鮮建陽二年時憲曆)’(1897)이라는 표제로 되어 있다. 이 두 시헌 역서에서는 밑의 난 밖에 처음으로 양력 날짜와 요일이 적혀 있고, 위의 난 밖에는 우리 나라의 국가적 · 민족적인 축제와 대왕 · 대비 · 왕세자 등의 탄신과 기신(忌辰) 등이 실려 있다. 이로써 역면만 보더라도 독립국가로서의 면모가 충분히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명시력시대(1898∼1908)

1879년(건양 2년, 고종 34) 8월에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라고 고치고 이어서 역명도 명시력(明時曆)이라 하였다. 명시력은 시헌력과 다를 바가 없지만 역명을 고친 이유는 독립국가로서의 민심을 새롭게 하기 위함인 듯하다. 명시력시대는 태양력의 보급에 박차를 가한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우리 나라에 대한 일본의 기반이 날로 굳어 갔고, 또 미국 · 러시아 · 프랑스 · 영국 등과도 거래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역시대(1895∼1910)

시헌력시대에 전혀 체계가 다른 역서, 예컨대 『광무2년력』과 같이 ‘역(曆)’이라는 이름의 책이 같은 관청 학부관상소(學部觀象所)에서 출간되었다. 이 역서는 모조지에 인쇄된 소형 책자인데, 이것은 앞에서 말한 시헌서와 같이 음력월 기준의 역서와는 달리, 양력월 기준으로 꾸며져 있다. 이 역서의 짝수면 처음에는 양력월명과 그 대소 및 그 달의 일수를 적어 놓았다. 전체적으로 종서형(縱書型)인데 약력일과 칠요는 역면의 윗단에 올려 놓고, 중단에 음력일과 일진이 적혀 있다. 역주는 합삭 · 상하현 · 망의 시각이 적혀 있을 뿐, 수(宿) · 직(直), 기타 미신에 관한 것은 전혀 기재되지 않았다. 역면 위의 난 밖에는 대왕대비의 탄신일과 제일(祭日)이 실려 있다. 그리고 24기의 입기 시각 밑에 일출입 시각과 주야각이 적혀 있는 간단한 역서이다.

‘역(曆)’이라는 이름으로 역서가 나온 것은 1896년에 태양력이 채택된 뒤부터이다. 이 역시대 중 처음 2년간은 시헌력이, 다음의 11년간은 명시력이 ‘역’과 함께 출간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역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간단한 태양역서였다. 명시력은 1908년에 끝맺고, 1909년에는 『대한융희3년력』, 1910년에는 『대한융희4년력』이 나왔다. 이들 역도 양력일과 요일이 역면의 상란에 적혀 있다. 그런데 이 두 역에서는 일출입 시각, 낮의 길이, 28수, 12직, 납음 등이 1908년까지의 역과는 달리 새로이 실려 있다. 미신에 관계되는 사항이 다시 실리게 된 이유는 명시력의 전통을 이어받자는 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의는 남아 있고 불의가 역주에서 사라진 것은 역시대부터이다. 역시대는 1910년을 마지막으로 한다. 한일간의 합방조약이 이 해 8월에 체결됨으로써 대한제국은 끝이 난다.

조선민력시대(1911∼1936)

경술국치 다음해인 1911년부터 총독부 관측소에서 편찬한 『조선민력(朝鮮民曆)』이 사용되었다. 이에 앞서 바로 전해인 1910년 4월 1일에는 오전 11시를 12시로 고쳐 씀으로써 일본과의 시차를 없앴다. 1913년에는 우리 나라와 일본 사이에 음력 날짜가 간혹 하루씩 달라지는 것을 통일시켰다. 그리고 1915년부터는 매일의 월출 · 월입 시각을 기재하였고, 1933년부터는 월백도(月白圖)를 음력으로 다달이 그려 넣었다. 역면에는 위쪽 난부터 약력일 · 요일 · 월출 시각 · 월입 시각 · 음력일 · 일진 · 납음 · 28수 · 12직이 적혀 있고, 가장 밑의 역주에는 제사지내는 것, 이사하는 것 등에 마땅한 날 등을 적어 놓았다.

약력시대(1937∼1945)

약력(略曆)은 양력일에 칠요 · 간지 · 일출 · 일남중 · 일입 · 주간 · 월령 · 음력일 · 월출 · 월입 · 만조 시각 · 간조 시각 등이 역면 전체를 메우고, 길흉에 관한 역주는 전혀 없다. 1940년부터는 역면에서 음력일은 없애고 월령은 그대로 실어 놓았다. 이 시대의 책력은 1939년까지는 총독부 관측소, 1940년 이후는 관측소의 후신인 총독부 기상대가 편찬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41년과 1942년에는 월주를 한글과 일본어로 병용하였다. 1943∼1945년에는 월주를 일본어만으로 적었다. 제2차세계대전중의 용지 절약 때문에 1942년의 책력은 B5판으로 줄이고 다음해부터 8 · 15광복까지의 3년간은 A5판으로 더 축소시켰다. 이 약력시대의 책력에는 일본의 정책이 너무나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역서시대(1946년 이후)

1945년 8월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자 한반도는 일제의 식민지에서 벗어났다. 처음에는 역의 발간도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가 1948년 8월에 국립중앙관상대가 발족되었다. 이곳에서 1949년 대한민국정부의 『약력(略曆)』, 1950년 『경인역서(庚寅曆書)』가 발간되었다. 이후의 책력은 ‘역서’라는 이름으로 계속 출판되었는데 모두 가로쓰기로 쓰여 있으며, 의 · 불의 등의 역주는 전혀 적혀 있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말에 빼 버렸던 음력 날짜가 역면에 다시 올랐고, 12직과 28수도 실렸으며, 역서의 크기도 커졌다. 관상대에서 발행한 역은 1975년으로 끝나고, 1974년 9월에 국립천문대가 발족되어 역서는 관상대의 손을 떠나 천문대로 옮겨 갔다. 천문대에서는 1976년의 『역서』부터 간행하였다. 이 초기의 역은 기상현상에 너무 소홀하였으며, 천문현상에 치중한 느낌이 있었다. 그러다가 1979년의 『역서』에서부터는 다시 기상과 농업에 관한 사항이 역에 기재되기 시작하였다.

백중력 · 천세력 · 만세력

우리 나라에서 임진왜란을 겪고 있는 동안, 명나라에서는 서양 과학을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한반도에서는 서양 역법, 즉 시헌역법을 도입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이리하여 17세기 전반인 인조 때는 시헌력의 도입 기간이고, 17세기 후반인 효종 이후는 시헌력의 준용 기간이며, 18세기 전반은 시헌력의 충실 기간이다. 이 동안에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이제는 장기적인 역법이 확립되어 18세기 후반에는 『백중력(百中曆)』 · 『천세력』 · 『만세력(萬歲曆)』을 편찬하기에 이르렀다.

백중력은 원래 100년간의 일월성신과 절후의 변동을 추산한 역서를 말한다. 영조 때 역일에 매일매일 28수와 칠정(일월 · 오성)을 배당하여 24기와 비교해서 1736년(영조 12)부터 1767년에 이르는 32년간의 역서를 꾸몄다. 이것을 『칠정백중력(七政百中曆)』이라 하며, 4권 4책으로 되어 있다. 이 『칠정백중력』을 시헌역법으로 계산하여 1772년부터 1781년(정조 5)까지 10년간의 역서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시헌칠정백중력』이라 하며, 1책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도 불과 10년밖에 쓸 수 없으므로, 이번에는 다시 1782년부터 1881년(고종 18)에 이르는 100년간의 역서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최초의 『백중력』이다. 전체가 1책으로 되어 있고 월의 대소, 삭의 일진, 입기 일시를 대통력과 시헌역법의 두 방법으로 계산하여 함께 실었다. 현재 1780년부터 1904년까지 124년간의 것이 남아 있다.

천세력은 1782년(정조 6)에 왕이 서운관에 명하여 『백중력』을 토대로 1777년부터 100년간에 걸친 역을 편찬하게 하여 이것을 『천세력』이라 부르기로 하였다. 그리고 10년이 지나면 또 10년분을 미리 계산하여 보충하게 하였다. 전체는 3권 3책이다. 제1책은 1777년부터 1886년까지 110년간에 걸쳐서 달의 대소, 24기, 매월 1 · 11 · 21일의 일진을 시헌역법으로 추산하고, 제2책은 대통역법으로 추산하며, 제3책은 1693년부터 1792년까지 100년간을 대통 · 시헌 두 역법으로 추산한 것을 실어 두었다. 그리고 책의 첫머리에 1444년(세종 26)을 상원갑자로 하는 역원도(曆元圖)가 실려 있다. 원래 역에서는 과거에 추산하는 것이 실제와 달라지기 쉬우므로 항상 불안한 생각만 가지고 있었는데, 명 말에 샬(湯若望)이 정밀하게 교정함으로써 역법이 크게 밝혀진 덕택에 『천세력』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세력』은 1864년(고종 1)에 관상감이 『천세력』의 속편을 만들려고 하자, 왕이 이에 찬동하여 1777년 이후 20세기 초에 이르는 120여 년간의 역서가 한 책에 수록되기에 이르렀다. 『천세력』을 매 10년마다 추가 계산하여 붙여 나가면 몇만 년에 걸치는 역서도 한 책에 수록할 수 있으므로 1904년(고종 41, 광무 8)에 ‘천세력’이라는 이름을 고쳐서 『만세력』이라고 부르기로 하고 발간하였다.

참고문헌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상역고(象繹考)
『해동역사(海東繹史)』제17 성력지(星曆志)
『일교음양력』(이은성,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83)
『한국의 책력』(이은성, 정음사,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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