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순부(純夫), 호는 송파(松坡). 고종 때에 수태사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守太師門下侍郎平章事判吏部事)를 역임한 최보순(崔甫淳)의 4세손으로 찬성사(贊成事) 최비일(崔毗一)의 아들이다. 최부(崔阜)·최당(崔璫)·최수(崔琇)·최실(崔實)·최성지(崔誠之) 등 이름을 다섯 번이나 바꾸었다.
충렬왕 때 약관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외직으로 계림관기(鷄林管記)가 되었다가, 내직에 들어와 사한(史翰)의 직을 거쳐 춘궁(春宮: 東宮)의 요속(寮屬)이 되었다.
뒤에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는데, 충선왕이 무종(武宗)을 옹립할 때 측근에서 협력한 바 많았으므로 지감찰사사(知監察司事)에 임명되었다.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복위하자 동지밀직사사 대사헌(同知密直司事大司憲)·첨의평리(僉議評理) 등을 거쳐 찬성사에 올랐고,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광양군(光陽君)에 봉하여졌다. 이후 대제학(大提學), 판민부사(判民部事), 삼사사(三司使)를 역임하였다.
1320년(충숙왕 7) 충선왕이 티베트[吐蕃]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원나라에 있으면서도 왕을 시종하지 않아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1321년과 1322년에 걸친 오잠(吳潛)·유청신(柳淸臣)의 제2차 입성책동(立省策動)에는 김정미(金廷美)·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원(元)의 도성(都省)에 글을 올려 그 의논을 중지하도록 하였다.
1324년 관직에서 물러나 7년간 한적한 생활을 보내다 별세하였다.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일찍이 충선왕이 원나라에 머무를 때 역수(曆數)가 정밀함을 보고 최성지에게 내탕금(內帑金)을 내려 수시력(授時曆)을 배워오게 하였는데, 이것이 고려의 학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