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건(子建), 호는 탄수(灘叟)·탄옹(灘翁). 첨지중추부사 원송수(元松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군절도사 원호(元豪)이며,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원유남(元裕男)이다. 박지계(朴知誡)의 문인이다.
광해군의 정치가 점점 문란해지자 의사(義士)들과 인조반정 모의에 협찬하였고, 반정이 성공한 뒤에는 그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에 봉하여졌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전주부윤이 되고, 나주목사를 거쳐 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당시, 어영부사로서 남한산성을 지켰다. 1642년 형조판서로 승진되었으며, 뒤이어 강화부유수·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이 동안에 서인 중 공서(功西)에 속하여 청서(淸西)를 탄압하다가, 같은 파에 속한 김자점(金自點)과의 정권다툼으로 분당하여 원당(原黨)의 영수가 되었다.
1649년(효종 즉위년) 호조판서로서 한때 파직당하였고, 1651년에는 좌참찬·좌찬성을 지냈다. 1654년 병조판서가 되어 김육(金堉)이 적극 추진하려는 대동법(大同法)의 실시를 반대하였지만, 동전(銅錢) 유통에는 동의하여 보급 방법 등을 논의하는 데 참여하였다.
1656년 우의정을 거쳐 1662년에는 좌의정에 올라 내의원과 군기시의 도제조(都提調)를 겸직하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