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3년 인조반정 때 유생으로 아버지와 함께 가담해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군사를 모아 반란군을 토벌했다. 1625년(인조 3)에 서산군수가 되었으며 그 뒤 공조참판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가 강화로 피난하기에 앞서 순검사가 되어, 먼저 강화에 가서 군비를 정비하고 경계를 엄히 했다. 왕이 도착한 뒤에는 8도의 군량미를 조달하는 중책을 맡았다.
이듬해 광주목사로 남한산성방어사를 겸했다. 1632년 한성부의 좌 · 우윤이 되었다. 이어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죽자 국장도감(國葬都監)과 산릉도감(山陵都監)의 제조가 되었다. 1636년 나주목사로 나갔다가 전라도관찰사로 승진했다.
이때 조정에서는 남도의 군사를 동원해 평안도를 방어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시방은 양서(兩西)의 백성을 모아 대처하도록 하고 남도민은 군량미 조달에 활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호란이 일어날 조짐이 뚜렷해지자 입암산성(笠巖山城)을 수축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즉시 군사를 동원해 남한산성의 위급을 구원하지 않았다는 죄로 정산(定山)에 유배되었다. 1640년에 사면되어 제주목사로 나갔다. 이듬해 그곳에 안치되어 있던 광해군이 죽자 손수 염습하였다.
1642년 병으로 직책을 그만두었으나 겨울에 광주수어사(廣州守禦使)가 되었다. 이어 병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본의 아닌 일로 파직되었다. 1644년 다시 광주수어사가 되었으나 마침 심기원(沈器遠)의 역변(逆變)이 일어나, 형 이시백과 함께 관계되었다는 흉서사건으로 피해를 입었다.
1645년 호조참판이 되어 충청도와 전라도에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647년에는 병조참판이 되고, 가선대부에 승계(陞階)되었다. 이듬해 공조판서에 올랐다. 1649년 인조가 죽자 산릉제조를 거쳐 형조판서가 되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고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10월 사은사의 부사로 청나라에 들어가 외교 수완을 발휘해,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도록 했다. 다시 수어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 뒤 공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호조판서가 되어 폐정개혁(弊政改革)에 힘썼다. 그러나 김자점(金自點)의 모역사건이 일어나 김자점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현종이 즉위하자 공조판서로서 판의금부사를 겸하여 재차 호남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남한산성을 개수하다가 이듬해에 병으로 죽었다. 저서로는 『서봉일기』가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