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도 은산(殷山) 출신. 천례(賤隷) 출신으로 성품이 교활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가 요동을 침범한 후금(後金: 淸)을 토벌할 때 조선에 원병(援兵)을 요청하자, 조선에서는 강홍립(姜弘立)을 오도도원수로 삼고 김경서(金景瑞)를 부원수로 삼아 1만 3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게 했는데, 그도 이 때 강홍립을 따라 출정하였다.
1629년(인조 7)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의 휘하에 들어간 강홍립의 군대는 부차전투(富車戰鬪)에서 패배해 후금에 항복할 때 포로가 되었다.
이듬 해 조선 포로들은 석방되었으나, 그는 청나라에 살면서 청국어를 배우고 청나라에 우리 나라 사정을 자세히 밀고해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또한 1636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 장수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의 통역으로 입국해 청나라의 조선침략에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 그 뒤 청나라의 세력을 믿고 조정에 압력을 가해 영중추부사까지 올랐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를 두려워해 뇌물을 주고, 친척들에게도 벼슬을 주어 비위를 맞추었다. 그러나 또 1639년 그의 처족인 정주의 관노(官奴) 봉영운(奉永雲)을 정주군수로 임명하도록 강청(强請)하고, 이어 병조의 관리들을 구타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리며 조정을 좌우하다가 청나라로 건너가 살았다.
이 해 시강원서리(侍講院書吏) 강효원(姜孝元), 시강원필선 정뇌경(鄭雷卿) 등이 그를 제거하려다 오히려 죽임을 당하였다.
그 곳에서도 왕을 모독하고 갖은 행패를 부렸으며 청나라로 보내는 세폐(歲幣)를 노략질하였다. 1653년(효종 4) 심양(瀋陽)에서 성주포수(星州砲手) 이사용(李士用)에게 모살(謀殺)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