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호중(浩仲), 호는 이지(二知). 군수 신석정(申碩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서윤(庶尹) 신단(申湍)이고, 아버지는 승지 신경락(申景洛)이다.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윤기묘(尹起畝)의 딸이다. 족부 영원군(靈原君) 신경식(申景植)에게 입양되었다.
1624년(인조 2) 진사로서 명경시(明經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지 못했으나, 시험관의 천거로 별제(別提)에 제수되었다. 이어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 · 호조낭관 · 옥천현감 등을 역임했고, 1644년 영천군수(榮川郡守)로서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였다.
중앙으로 와서는 지평(持平)을 거쳐, 필선(弼善)이 되어 동궁(東宮) 뒤의 효종을 보도(保導)하였다. 여러 번 문 · 무의 시험을 관장했고 장령(掌令)을 거쳐 1649년 인조가 죽자 사성으로서 산릉감역(山陵監役)에 임명되었다. 그 뒤 승지 및 참의에 의망(擬望)되었으나 인척 관계에 있는 김자점(金自點)이 죄를 입어 축출되자 연안현감으로 나갔다.
김자점이 역모죄로 복주(伏誅)된 뒤 양주목사가 되었는데 역적의 가까운 친척을 관직에 둘 수 없다는 주장이 일어났다. 대사헌 홍무적(洪茂績)의 변론으로 논의는 그쳤으나 그 일로 끝내 벼슬은 크게 떨치지 못하였다.
뒤에 공주와 청주의 목사를 연이어 맡았는데 감사와 병사가 잇달아 표창을 건의할 정도로 정사를 잘 돌보았다. 지방관으로서 실무에 힘쓰고 개혁을 하되 급격히 하지 않아 힘들이지 않고 많은 일을 해서 감사 및 병사 · 방어사(防禦使) 등에 자주 천거되었으나 요로에 신속을 아는 사람이 없어 이루어지지 않았다.
7대조 신숙주(申叔舟)의 문집인 『보한재집(保閑齋集)』을 1644년에 개간, 보급하였다. 1655년(효종 6) 공주목사로 있을 때 『농사직설(農事直說)』의 간행본을 구하기 어려운 것을 한스럽게 여겨 당시의 달라진 속방(俗方)을 첨가하는 한편, 주희(朱熹)의 『권농문(勸農文)』 · 『금양잡록(衿陽雜錄)』 · 『사시찬요(四時纂要)』 등을 함께 묶어 『농가집성(農家集成)』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신속의 대표적인 업적이며, 17세기 농업기술을 연구하는 데 요긴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