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시찬요』는 조선 초기 주자소(鑄字所)에서 태종의 명에 의하여, 조선시대에 처음으로 주조된 금속활자 계미자(癸未字)를 이용하여 인출 및 간행된 농업서적이다. 이 판본은 동북아 삼국에서 알려진 같은 서명의 판본 중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간행본이며 본문의 내용은 월령식(月令式)으로, 농사에 관한 여러 가지 일이 수록되어 있다.
『사시찬요(四時纂要)』는 조선 초기 주자소(鑄字所)에서 태종의 명에 의하여, 조선시대에 처음으로 주조된 금속활자 계미자(癸未字, 1403~1420)를 이용하여 인출 및 간행된 농업 서적이다. 이 판본은 동북아 삼국에서 알려진 같은 서명의 판본 중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간행본이며 본문의 내용은 월령식(月令式)으로 기록한 농사에 관한 여러 가지 일이 수록되어 있다.
『사시찬요』의 편찬과 간행 시기는 8세기 말에 편찬되어 이후 중국의 여러 곳에서 간행 ‧ 유포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만 조선에서 1590년 경상좌병영에서 간행되었던 목판본의 저본에 수록된 발문에 의하면 송대 996년(至道 2)에 한주(杭州) 반가(潘家)에서 각수 시원길(施元吉)이 판각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밖의 『사시찬요』의 간행 기록으로는 북송 진종(眞宗) 천희(天禧) 4년(1020) 8월 이방(李昉)이 자신의 경험에 의하여 백성들이 파종에 대한 지식이 부족함을 느껴 『사시찬요』와 『제민요술(齊民要術)』을 판각, 출판하였다. 그 후 소흥(紹興) 연간(1131~1162)에도 다시 목판으로 새겨 민간에 유포하였지만 오늘날 중국에서는 이른 시기의 판본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 책이 한반도에 어느 시기에 전래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조선 개국 초에 정부에서 계미자로 찍었던 것으로 보았을 때, 개국 후 정치적 안정과 더불어 민생을 살리고자 농업 생산의 개선에 노력한 여러 방안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1590년의 판본 권말에 이 저본을 유희잠(柳希潛)이 오래전에 구하였으나 간행하지 못하였고 또 책 내용을 일부 고치고 중요한 요어(要語)만을 찬술하였다가 그 원고를 삭주(朔州)의 선공감(繕工監) 판관(判官)으로 부임한 박선(朴宣)에게 주었지만 미루다가 1577년 이후 재물을 내고 기술자를 모아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판에 새겨 출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590년 목판본에는 농사에 관련된 여러 가지 항목을 월령식으로 수록해 있다. 전체 698조 중 점후(占候), 택길(擇吉), 양진(禳鎭) 등이 348조이며 나머지 350조는 매달의 잡사에 이롭지 않게 되어 이를 내용별로 구분하면 481조 정도이다.
계미자 소자로 찍은 『사시찬요』는 현재 경북 예천의 남악(南嶽, 金復一) 종택의 소장본으로 그 형태적 특징을 보면 1책 77장이지만 권1의 권말 3장만 남아있고 권5의 권말 일부가 낙장되어 정확한 장수는 알 수 없다. 판면의 특징으로 한 면 11행 19자에 주(註)는 특소자(特小字) 및 극소자(極小字)가 두 줄로 배열되어 있다.
태종 때 주조된 계미자는 조선에서 주조가 가장 빠른 금속활자로서 그 인본이 많지 않다. 이 활자의 특징은 조판 형태에서 글자의 식자(植字), 배열 중 활자가 거꾸로 식자되거나 크기가 다른 활자를 섞어 조판한 것이다. 판식은 계미자 소자본인 『신간류편역거삼장문선대책(新刊類編歷擧三場文選大策)』과 같고 활자 가운데 송 태조의 성명인 ‘조광윤(趙匡胤)’ 중 ‘광(匡)’자의 마지막 1획이 결획된 자 등은 『신간류편역거삼장문선대책』, 『십칠사찬고금통요(十七史纂古今通要)』에서도 같은 양상이 나타난다.
이 책은 당시의 농업 기술과 사회경제 발전의 과정을 직 · 간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이 책의 약 40%의 내용이 점술과 미신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지만 이 역시 당시의 시류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중국에서 당시까지 전래된 문헌을 반영하여 정리하고 작물로부터 가축과 가공, 보관까지의 전반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