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은 인조 즉위 후 정원군(定遠君) 추숭에 관한 전례 논쟁이 벌어지자, 이정구(李廷龜), 오윤겸(吳允謙) 등과 이에 관한 논의를 주고받았다. 그들 사이에 오고 간 편지글과 사계가 그에 관해 고증한 사례들을 모아 1624년(인조 2)에 정리한 것이 『전례문답』이다. 그 후 후손들이 1922년에 『사계전서』를 편찬하였는데, 그 안에 권21과 권22로 수록되었다.
『사계유고』를 보면, 1624년(인조 2)에 김장생은 이정구, 오윤겸 등과 함께 사친(私親) 추숭의 전례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이때 논의한 왕복서(往復書) 등을 묶어 ‘전례문답(典禮問答)’이라 하였다. 1922년 후손들이 둔암서원(遁巖書院)에서 『사계전서(沙溪全書)』51권 24책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이 전서는 유고(遺稿) 13권과 아울러 『경서변의(經書辨疑)』, 『가례집람(家禮輯覽)』, 『상례비요(喪禮備要)』등을 합하고 부록을 더 증보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중에서 『전례문답』은 권21~권22로 수록되었다.
『전례문답』은 사계 김장생의 편지글과 고증 사례들을 모은 것이다. 이 글은 제목 그대로 전례에 대해 묻고 답한 글이 주를 이루지만, 사계 자신의 견해를 부록하거나 특정 인물에게 보낸 편지글들도 있다. 또 이를 증거할 만한 전례와 근거들을 고증이라 하여 그림과 함께 실었다.
정원군 추숭에 대해 사계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 위하여 보낸 첫 편지는 1624년(인조 2) 6월에 우의정 신흠,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 이조판서 오윤겸, 예조판서 이정구, 부제학 정경세·조익·정홍명·최명길·장유에게 보낸 것이다. 지중추부사 이정구가 경연석상에서 아뢴 것의 뒤에 쓴 글은 1624년(인조 2) 10월 23일에 있었던 주강에서 이정구와 정경세가 정원군의 호칭에 대한 사계와 박지계의 설을 논란한 사실에 관한 것이다. 먼저 그 대화내용을 싣고 그 말미에다 사계 자신의 견해를 변론하였다. 이와 같은 형식이 1630년(인조 8) 8월 19일의 주강에 있었던 이귀의 주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후 전례에 관한 문답이 이어졌는데, 신흠에게 답한 글이 1626년(인조 4) 5월이었다. 장유와 최명길, 정홍명 외에, 1627년(인조 5) 1월에 한교에게 답한 글이 있다.
편지글이 아닌 것으로서 송호부(宋戶部)가 예에 대해 논한 글 뒤에 쓴 글이 있다. 송호부는 중국사람 송헌(宋憲)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실록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모두 헌(獻)으로 되어 있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1629년(인조 7) 중국에 사신으로 가던 최유해(崔有海)가 호부낭중 송헌에게 추숭에 관한 예를 물어 그가 지어준 설을 이귀(李貴)에게 보였는데, 이귀가 차자를 올리면서 이 글을 바쳤다고 한다. 그 설에 대해 사계가 이론을 덧붙인 것이다.
장유에게 목릉(穆陵)의 면복(緬服)을 입는 일에 대해 논하기 위해 보낸 편지는 일실되었다. 1631년(인조 9) 1월에 조익 등에게 보낸 편지는 칭고(稱考)의 잘못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조익과 최명길 등의 견해를 묻는 편지이다.
권22의 『전례문답』은 고증(考證)이다. 첫째는 『의례』 출전의 천자제후정통방기복도(天子諸侯正統旁朞服圖)에서, 임금의 부모와 처와 장자와 조부모를 위하여 입는 부장기(不杖朞)에 대해서, 자하의 전(傳)과 정현의 주(注), 가공언의 소(疏)를 통해 고증한 것이다. 둘째는 신종군복도(臣從君服圖)에 대해, 양복과 『통전』, 『강목』등을 근거로 고증한 것이다. 여기에는 간간이 사계의 견해를 덧붙였다. 셋째는 명나라 헌종부터 세종까지의 계보를 그림으로 그리고, 세종이 흥헌왕의 제사를 주관할 사람과 칭호에 대해 의논하게 한 사실과 관련한 기사들을 모두 수록하고, 마지막에 사계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조손(祖孫)의 왕통 계승이 이루어진 인조가 사친인 정원군을 추숭하고 그에 따라 발생하는 호칭과 주사(主祀) 등의 전례가 조정에서 논쟁으로 번지자, 정자와 주자의 이론에 입각하여 선조를 고위(考位), 사친을 숙항(叔行)으로 정립하고자 한 사계의 논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