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압해(押海). 자는 사원(士元). 정호경(丁好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언규(丁彦珪)이고, 아버지는 정시걸(丁時傑)이며, 어머니는 이정방(李廷芳)의 딸이다.
1646년(인조 24) 생원시에 합격하고 1652년(효종 3) 참봉으로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57년(효종 8) 정언이 된 이후 지평·장령 등 청직에 10년 이상을 몸담으면서 언관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1663년(현종 4) 동지사 조형(趙珩)과 함께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다녀왔다.
1673년 종성부사(鍾城府使)로 임명되었다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가자(加資)가 취소되기도 하였다. 그는 필선·헌납·집의, 삼척부사(三陟府使) 등을 지내다가 숙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주로 문한직이나 언관직에 있었으며 황해도관찰사·광주부윤 등 지방관도 역임하였다.
1682년(숙종 8)의 허새(許璽)의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정배되었다. 이 역모는 허새를 포함하여 민암(閔黯)·권대운(權大運)·오시복(吳始復)·오정위(吳挺緯), 정창도 등 16인이 회맹하여 수원·장단 등 경기 각지에서 동시에 거사하여 복평군(福平君)을 추대하고 대왕대비에게 수렴청정하게 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고변내용에서 정창도는 경기도 광주를 맡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 뒤 그의 죄명이 문안과 다름이 있다하여 그의 사후인 1689년에 복작(復爵)되었다. 그리고 1693년에는 아경직(亞卿職: 육조의 참판, 좌·우윤 등을 공·정경 등에 상대하여 부르던 이류)을 추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