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행임(尹行恁, 1762~1801)은 본관이 남원, 자가 성보(聖甫), 호가 석재 또는 방시한재(方是閒齋) 등이다. 석재는 정조가 ‘큰 과일을 다 먹지 않는다[석과불식(碩果不食)].’는 『주역(周易)』에서 그 뜻을 따서 지어주었다고 한다.
각 권의 처음에는 「신호수필(薪湖隨筆)」이라 하여, 짤막한 글을 먼저 쓰고서 본문이 시작된다. 여기에서 신호(薪湖)는 강진현 신지도의 앞바다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책은 그곳에서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읽으며 자신의 견해를 차례로 정리해 자유롭게 기술하여 펴냈다.
이 책은 윤행임이 1801년(순조 1) 신유 옥사(辛酉獄事)에 연루되어 강진현 신지도로 유배된 시절에 지었다. 그해 5월에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한지 5일 만에 유배되었으며, 6월 중순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9월 16일에 사사되기 직전에 마쳤으니, 4개월여 만에 완성한 것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은 11책이며 연세대학교 소장본은 23권 11책인데, 1책의 권1~2가 시(詩)·기(記)·비문(碑文)·서(序)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1책이 들어있지 않은 판본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으로, 21권 10책이다.
서문과 발문은 없다. 장서각 소장본은 권12는 『논어』 상·하, 권34는 『맹자』 상·하, 권5는 『대학』, 권6은 『중용』, 권78은 『주역』 상·하, 권910은 『상서』 상·하, 권1112는 『모시』 상·하, 권1314는 『소학』 상·하, 권15~16은 『예기』 상·하, 권17은 『좌전』, 권18은 『십구사략』, 권19는 『통감절요』, 권20은 『사물요의(四勿要義)』, 권21은 『경전동이(經傳同異)』이다.
『논어』상·하는 서문에서 그해 여름에 유배 중인 섬에서 지었다고 하였는데, 『논어』본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한 것이다. 상편은 ‘학이’부터 ‘자한’, 하편은 ‘향당’부터 ‘요왈’까지이다. 『맹자』상·하는 『논어』의 주해를 마친지 7일 만에 쓴다고 하였으며, 상편이 만장까지이고, 하편이 고자 이하이다. 『대학』은 1799년(정조 23)에 어찰(御札)을 통해 정조와 경전의 해석을 주고받은 뒤,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소책자를 만들어 정조에게 바쳤다고 한다. 정조는 책명을 ‘노전추록(魯傳秋錄)’이라 지어주었는데, 이 편이 곧 그것이다.
『주역』은 오묘한 뜻을 밝히는 것보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서 정리한 것으로, 계사전은 서계전(序卦傳)과 잡괘전(雜卦傳)까지 언급하였다. 『상서』는 요전과 순전에 핵심이 있다고 보고, 상편에서 우서와 하서를 다루고, 하편에서 탕서부터 그 이하를 다루었다. 『모시』는 아(雅)와 송(頌)이 마음에 감동을 주고 몸에 정책이 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면서 『시경』의 가르침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 그는 상편에서 국풍, 하편에서 아와 송을 다루었다.
『소학』은 성인의 교훈이 넓디넓으며 그 훌륭한 업적이 빛나기 때문에 포함시켰다면서, 상편에서 계고편을 언급하고, 하편은 가언과 선행편으로 구성하였다. 특히, 경문에 대한 의문을 ‘혹왈(或曰)’로 시작하여 자신의 견해를 풀이한 것이 다른 것과 다르다. 『예기』는 상편에서 곡례부터 교특생, 하편에서 내칙부터 그 이하를 다루었다. 『좌전』은 옛날 아호(鴉湖)라는 모임에서 재종형인 해주공 괴리자(槐里子)에게 배웠는데, 다시 들추어보니 생사의 감회를 금할 길 없다고 하였다. 『십구사략』과 『통감절요』는 어부의 집에서 빌려 보았다고 하였다.
『사물요의』는 논어 출전의 시청언동(視聽言動)의 사물(四勿) 관련 사항들을 추출해 편집한 것이다. 『경전동이』는 각 경전에서 문구가 다른 것들이 그렇게 쓰인 연유를 설명한 것이다.
정조가 만년에 주자의 모든 글을 집대성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윤행임에게 책임을 지웠지만, 유배에 처해지는 바람에 완성하지 못한 일이 이 저술과 관련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