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 한확(韓確)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춘천부사 한승권(韓承權)이며, 어머니는 조계상(曺繼相)의 딸이다. 중종의 차녀인 의혜공주(懿惠公主)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다. 위호는 청원위(淸原尉)이고, 문음으로 출사하였다.
명종이 즉위할 때 수종한 자들을 원종공신에 기록하였는데, 이 때 그는 추성협익정난위사공신(推誠協翼定難衛社功臣) 2등에 녹훈되고, 광덕대부(光德大夫)로서 청원군에 제수되었다.
1547년(명종 2)에는 을사공신녹훈 1주년을 맞아 가자(加資: 자품을 올려 줌.)되어 성록대부(成祿大夫) 청원부원군에 제수되었다. 그는 왕의 총애가 깊어 조정의 시비와 인물의 진퇴에 간여하는 바가 많았는데, 그의 힘을 빌어 출세한 이들의 패려한 행위에 대한 탄핵이 끊이지 않았다.
그도 시정배들이나 종친들과 어울리며 창기를 간음하거나 남의 재산을 침탈하는 등 불의한 일을 많이 저질러 명종년간에 여러번에 걸쳐 파직과 추고를 당하기도 하였다. 당시 사관들의 비판 가운데 하나를 보면, 1556년(명종 11) 9월 23일에 그의 집에 벼락이 쳤는데, 이를 두고 ‘하늘이 벌을 내린 것이다.’라고 하였다.
1577년(선조 10)에 사화(士禍)로 인한 위훈(僞勳)을 도모한 자들을 삭탈관작하고 문외출송하였는데, 이 때 그도 파직되었다. 그 뒤 선조가 직첩을 환급하자 1581년에 다시 양사가 파직을 청하였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1593년 10월에 관원을 보내 치제(致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