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양관 ()

조선시대사
유적
심양 대남문 북쪽 100보 지점(현재 유실)에 있는 조선후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관련 해외공관.
이칭
이칭
심관(瀋館), 고려관(高麗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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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심양관은 청나라 수도 심양에서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이 머물던 처소 겸 집무소이다. 청나라에서는 고려관이라고 불렀으며 심양 대남문 북쪽 100보 지점에 있었고 청나라가 북경으로 천도하며 처소를 옮기기 전까지 사용하였다. 세자 일행은 인질의 신분이기는 하였으나, 조선과 청의 연락을 담당하였고 외교 업무도 수행하여 해외공관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심양관의 유지 관리에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고 세자가 청의 황족 및 장수들과 친교를 맺고 세자빈이 무역에 간여하는 등의 일로 인조에게서 의혹과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심양관은 현재 철거되어 찾아볼 수 없다.

정의
심양 대남문 북쪽 100보 지점(현재 유실)에 있는 조선후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관련 해외공관.
개설

조선병자호란 후 1637년(인조 15) 2월 ‘정축맹약’에 따라 소현세자(昭顯世子)봉림대군(鳳林大君) 및 3정승 6판서의 자제들을 심양에 인질로 보냈다. 심양의 세자와 대군이 머물던 처소 겸 집무소를 ‘심양관(瀋陽館)’ 또는 ‘심관(瀋館)’이라고 하였다. 청나라에서는 이를 ‘고려관(高麗館)’이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세자와 대군의 가족 및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의 관속들이 함께 거주하며 집무하였다.

심양관에 거주하였던 소현세자 일행은 인질의 신분이었지만, 조선과 청의 연락을 담당하였고 외교 업무도 수행하였다. 1644년(인조 22) 청이 북경을 점령하여 천도한 후에 소현세자 일행도 북경으로 처소를 옮겼고, 그해 12월에 인질에서 해방되어 서울로 돌아왔으나, 그 후에도 이 건물을 심양관이라고 불렀다.

역사적 변천

심양관 건물은 1637년(인조 15) 청나라에서 소현세자 일행을 수용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그해 4월 세자 일행이 심양에 도착하였을 때는 건물이 완공되지 못하여 일행은 조선 사신들의 숙소인 동관(東館)에 머물다가 5월 7일에 입주하였다. 당초에 완성된 건물은 모두 18칸(정침 5간, 동서 상방(廂房) 10칸, 대문 3칸) 규모였으나, 전체 인원을 수용하기에는 협소하였다.

1640년(인조 18) 4월에는 화재로 서연청 건물이 전소되었고, 다음 해 여름에는 폭우로 일부 건물이 무너져 청 정부에서 수리해 주었다. 1644년(인조 22) 청이 북경을 점령하고 9월에 천도할 때 소현세자 일행도 북경으로 처소를 옮겼다.

내용

병자호란으로 45일간 항전한 끝에 조선은 1637년(인조 15) 1월 30일 국왕 인조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이틀 전에 확정된 이른바 ‘정축맹약’에 따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및 대신과 판서의 자제들을 심양에 인질로 보내게 되었다. 세자와 대군은 수행 관원들과 함께 새로 지은 심양관에 거주하였고, 대신 판서들의 질자(質子)들은 동관과 서관에 나누어 거처하였다.

심양관은 대남문(大南門, 德勝門) 북쪽 120m에 있었는데, 현재 조양로(朝陽路) 동편에 위치한다. 여기에는 세자와 대군의 가족 및 그들을 보좌하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관속들 및 환관, 궁녀, 역관, 군관, 의원들도 함께 거주하며 일하였다. 대신 판서들의 질자들을 포함하면 이들의 총수는 거의 300여 명이나 되었다.

심양관에서 거주하는 많은 인원들의 식량과 부식은 청나라 정부에서 제공하였고, 후에는 돈(은)으로 지급하였다. 그러나 항상 부족하였으므로 심양관 자체에서 담배나 소금을 팔아 조달하기도 하였고, 채소와 과일은 평안도에서 매달 수송해 오기도 하였다. 1641년부터는 청나라 정부에서 심양관에 농경지를 지급하고 자체 경작하여 식량을 조달하도록 하였다. 이에 심양관은 평안도에서 농부들을 모집하여 농사를 지음으로써 식량을 자체 조달할 수 있었고, 약간의 무역도 할 수 있었다.

청은 초기에는 심양관을 엄중하게 감시하였으나, 점차 완화되어 소현세자 일행도 여유를 가지게 되었고, 청의 황족이나 장수들과 교제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친분으로 심양관은 조선의 입장을 대변하고 청의 부당한 간섭이나 무리한 요구를 외교적으로 무마하기도 하였다.

세자 일행은 인질의 신분이기는 하였으나, 점차 조선의 외교관 역할을 하였으므로 심양관은 일종의 공관과 같은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서는 8년간 두 나라 사이의 현안 문제들을 해결하는 역할을 하였고,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심양관의 유지 관리에는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었고, 또한 세자가 청의 황족 및 장수들과 친교를 맺고 세자빈이 무역에 간여하는 등의 일로 인조에게서 의혹과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특징

심양관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철거되고 그 자리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흔적을 찾기 어렵다. 그러나 그 지명 ‘고려관호동(高麗館胡同: 까오리관 후퉁)’은 아직도 남아있다.

의의와 평가

심양관은 병자호란으로 인해 생긴 인질 관소였지만, 조선의 2인자였던 세자가 여기에 주재하면서 청과 조선 사이의 연락과 외교를 담당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 상주 공관과도 같은 성격을 지녔다. 여기서 소현세자 일행은 청나라 황족 등과 친분을 맺고 두 나라 사이에 많은 현안 문제들을 조정하여 해결하였다.

그러나 세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청의 지나친 요구들을 다 막지 못하였고 막대한 경비를 지출하게 되어 본국에서 비난을 받았다. 이는 당시의 세자나 심양관으로서는 불가항력이었고, 그들은 8년간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심양일기(瀋陽日記)』
『심양장계(瀋陽狀啓)』
『소현세자 시강원일기(昭顯世子侍講院日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심양장계: 1637~1643년 심양에서의 긴급 보고』(심양관, 아카넷, 2014)
『병자호란사』(유재성,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6)
「소현세자빈 강씨의 심양관 생활」(김남윤, 『역사연구』24, 역사학연구소, 2013)
「『심양일기』와 소현세자의 볼모살이」(김남윤, 『규장각』29,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06)
「『심양관도』화첩과 서양화법」(박은순, 『미술자료』58, 국립중앙박물관, 1997)
「초기조청관계에 대한 일고찰: 병자호란시의 피로인 문제를 중심으로」(김종원, 『역사학보』71, 1976)
「瀋館宗藩外交研究(1637-1644)」(玄花, 博士學位論文, 吉林大學文學院, 2013)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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