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명동성당은 서울특별시 중구에 있는 대한제국기에 준공된 서울대교구 주교좌 성당이다. 명동성당은 우리나라 천주교의 상징이자 구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1977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 유일의 순수한 고딕 양식의 연와조 건물로, 1892년(고종 29)에 착공하여 1898년에 준공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양옥 건축의 기술자가 없었으므로 벽돌공, 미장이, 목수 등을 중국에서 데려다가 일을 시켰다. 이후 명동성당은 ‘뾰죽집’이라는 이름으로 장안의 명물이 되어 매일 많은 구경꾼이 몰려왔다고 한다.
명동성당이 자리잡은 대지는 종현(鐘峴)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1882년 한미수호조약(韓美修好條約)이 체결되면서 종교의 자유가 어느 정도 허용되자, 당시 교구장이던 주교 블랑(Marie Jean Gustave Blanc, 1844~1890)이 성당 부지로 이곳을 매수하여 종현 본당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곳은 조선왕조 역대 왕들의 어진(御眞)을 모신 영희전(永禧殿)과 가까워 성당 건립으로 영희전의 풍수(風水)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소유권을 억류하여 착공이 지연되기도 하였다.
그 뒤 1892년 5월 8일 정초식을 가졌다. 설계와 공사 감독은 신부 코스트(E. J. G. Coste, 한국명 고의선(高宜善))가 직접 맡았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양옥 건축의 기술자가 없었으므로 벽돌공, 미장이, 목수 등을 중국에서 데려다가 일을 시켰고, 도중에 재정난과 청일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1896년 벽체공사가 끝날 무렵 설계 · 감독을 맡았던 코스트가 죽고 프와넬(Victor Louis Poisnel, 1855~1925)이 뒤를 이어 내부공사를 속행하여 1898년 5월 29일에 축성식을 거행했다. 이후 명동성당은 ‘뾰죽집’이라는 이름으로 장안의 명물이 되어 매일 많은 구경꾼이 몰려왔다고 한다.
1945년 광복 이후 종현본당은 명동본당(성당)으로 불리게 되었고, 1947년과 1973년 두 차례의 수리공사와 사제관 · 교육관 등 부속건물의 건립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교회 창설 200주년을 맞아 1981년부터 스테인드글라스, 지붕동판 교체 등 대대적인 복원수리공사에 착수하여, 1984년에 마무리 지었다. 이후 2002년에는 다시 대성당 보수 공사에 착수하여 6년이 지난 2009년 초에 종탑 보수, 외벽 벽돌 교체, 스테인드글라스 보수 등의 공사를 완료했다.
명동성당은 전체 길이가 약 68m, 너비 29m, 높이 23m에 종탑 높이는 약 47m이며 건축 면적이 427평이다. 명동성당의 평면은 라틴 십자형 삼랑식(三廊式)이고, 건축양식은 고딕양식이나 고딕의 정수(精髓)인 석조(石造)가 아니고 연와조이기 때문에 고딕양식의 장중함은 덜하지만 가능한 한 벽돌로 고딕적인 디테일을 추구하였다. 20여 종에 달하는 적색과 회색의 이형(異形) 벽돌로 내외 각 부분에 알맞는 전통적인 고딕 공법(工法)을 따른 것이 그 예이다.
종탑의 좌우에는 팔각의 작은 탑이 있어 2층 회랑으로 연결되어 계단실 구실을 하고 있으며, 외벽에는 같은 간격으로 부축벽이 있고, 외벽 끝 양단과 트랜셉트(transept) 부분의 양끝 모서리의 직교(直交)하는 부축벽 상부에는 소첨탑이 설치되어 있어서 고딕양식의 특징을 살렸다. 모든 창은 아치형이고 열주(列柱)는 이형 벽돌을 사용하여 석재의 조각적인 효과를 내고 있으며, 스테인드글라스는 중세양식으로서 원래 프랑스에 있는 한 수도원에서 제작한 것인데 1981년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원형대로 보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