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호는 조선 후기 『구령요의』, 『소원신종』, 『봉교자술』 등을 저술한 천주교 지도자이다.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고, 황해도 및 평안도의 전교 회장에 임명되었다. 1866년 박해 이후 은거했다가, 1876년 선교사제들이 재입국하자 교회 활동을 재개했다. 블랑 주교의 복사이자 도회장(都會長)으로 활동하면서 신자 교육, 천주교 서적 저술을 했다. 1883년 블랑 주교의 성성식에 수행하여 참석했다. 1891년 모든 직무를 내려놓고 하우현에 정착하여 공소 강당 건립과 본당 설정에 힘썼으며, 1903년에 사망했다.
고향으로 내려간 후 가문의 핍박을 받자 황해도 서흥군으로 옮겨 갔다. 베르뇌 주교에 의해 황해도 및 평안도 지방의 전교 회장으로 임명되어 각 지역을 돌면서 전교에 힘썼다. 1866년에 천주교 박해로 인하여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경기도 삭녕군에 자리를 잡고 가족들과 함께 몇 년간 은거해 살았다.
천주교회는 1876년에 블랑(Blanc) 신부를 비롯한 프랑스 선교 사제가 다시 조선에 들어오면서 재건되기 시작했다. 그해 김기호는 블랑 신부를 수행하여 강원도 각지를 순회했고, 블랑 신부의 지시에 따라 1877년에 입국한 두세(Doucet) 신부와 로베르(Robert) 신부를 황해도 배천군(현, 연백군)에 있는 자기 집으로 데려 가서 조선의 말과 풍습을 가르쳤다. 1878~1879년 삭녕군 지역에 로베르 신부와 함께 거주하면서 조선인 예비 신학생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1879년 가을에 평안도 지역의 전교를 맡으라는 블랑 신부의 편지를 받고, 평안도 지역을 돌면서 3년 동안 신자들을 찾아 교리를 가르쳤다.
1882년 주3 장 권한 대행인 블랑 신부가 전라도에서 서울로 올라오자 주4이자 도회장(都會長)으로 활동했다. 이 무렵 청계산 아래 광주 토구리(하우현 지역. 현, 의왕시 청계동)에 가족들을 거주하게 했다. 1883년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열린 블랑 주교의 주5에 주교를 수행하여 참석했고, 귀환할 때 나가사키에서 배를 타고 상해를 거쳐 제물포를 통해 입국했다. 블랑 주교의 지시로 성경 복음서의 해설서인 『성경직해(聖經直解)』의 한글 번역본을 수정하는 작업을 몇 년간 수행했다. 1891년에 『성경직해』의 수정본을 완성했고, 1892년에 뮈텔(Mutel) 주교의 주6 아래 『성경직해』가 간행되었다. 1890년 블랑 주교가 사망하자 1891년 4월경 뮈텔 주교에게 허락을 받고 교회 직무에서 물러나 토구리(하우현)로 내려갔다.
1893년 하우현 신자들과 함께 공소 강당 건립을 청원했고, 힘을 합쳐 1894년에 공소 강당을 세웠다. 1900년에 하우현 공소가 왕림본당에서 분리되어 본당이 되었다. 그로부터 약 3년 후인 1903년에 하우현에서 김기호는 사망했다.
김기호는 1879년에 로베르 신부의 지시로 기본 교리를 쉽게 풀이한 『구령요의(救靈要義)』를 저술하였다. 1885년 프와넬(Poisnel) 신부의 지시로 신자 교육을 위한 교리 문답서인 『소원신종(溯源愼終)』을 저술했다. 1901년에 자신의 일생과 활동을 담은 『봉교자술(奉敎自述)』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