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는 조선 후기 1866년부터 1873년까지 8년 동안 국가적 차원에서 지속된 천주교 박해이다. 프랑스와의 조약을 통해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 대신 천주교를 공인받으려는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회담은 국제 정세의 변화와 조선 정부 내의 반발로 결렬되었고,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다. 병인양요(1866년)와 남연군묘 도굴 사건(1868년), 신미양요(1871년) 등 서양 국가와의 충돌은 박해를 격화시켜 교회 조직이 철저히 파괴되었고, 수천 명의 순교자가 탄생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의 하야로 박해가 끝났다.
1864년 1월, 철종이 사망하고 12세의 고종이 즉위하자 풍양 조씨 가문의 조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흥선군 이하응(李昰應)이 ‘섭정’의 권한을 위임받아 국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1860년 북경 조약의 결과로 조선과 국경을 맞대게 된 러시아는 1864년 2월(음력)에 통상을 요구해 왔다. 이 일을 보고받은 흥선대원군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조선대목구장 주1 주교에게 러시아의 진출을 막아 주면 천주교의 자유를 선포할 것이라는 제안을 했다. 베르뇌 주교는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고 대원군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러시아의 교섭 요청이 조선 침략의 일환이며 이를 막기 위해서는 서양(프랑스)과의 외교 관계 조약 체결이 선결 과제라는 것을 암시했다.
1865년 음력 9월, 러시아인들이 또 다시 통상 요구를 하자 대원군과 베르뇌 주교의 물밑 접촉이 진행되었다. 베르뇌 주교는 자신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대신 조선 신자들과 대원군 주변 인물을 통해 대원군과의 회담을 추진했다. 몇 차례의 접촉 끝에 신자 측 대표로 나선 남종삼(南鍾三)이 대원군을 만나 주교와의 만남 약속을 얻어 냈다. 이에 지방 사목 중이던 베르뇌 주교와 부대목구장 주2 주교가 1866년 1월 말 서울에 도착하여 회담을 기다렸다. 1월 31일 남종삼은 다시 대원군을 찾아갔으나 그는 냉담한 반응을 보이면서 주교들과의 약속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베르뇌 주교는 결국 회담이 성사되어 천주교의 공인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다. 그러나 1866년 2월 19일에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2월 23일에는 베르뇌 주교와 홍봉주가 체포됨으로써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주교들과의 면담을 요청했던 대원군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천주교를 박해하게 된 이유에 대해, 주3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첫째, 대원군이 교회와 접촉하도록 만든 러시아인들의 위협(통상 요구)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둘째, 중국에서 서양인들을 처형하고 있다는 사신의 보고가 1866년 1월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셋째, 대원군으로 하여금 서양인과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라는 대신들의 압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대원군은 러시아의 위협이 사라진 상황에서 대신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고, 자신과 천주교와의 연관성이 드러날 경우 입게 될 정치적 타격을 막아야 했다. 이에 대원군은 대신들의 주장을 따랐고, 그 결과로 병인박해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한편, 병인박해의 원인을 선교사제들의 정치 개입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당시 북경 프랑스 공사관의 전속 의사였던 마르탱(Martin)은 「1866년의 조선 원정」(L'expédition de Corée 1866)에서, 조선 정부 내에 조선의 개방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두 세력이 있었는데, 선교사제들이 개방을 바라는 사람들과 접촉하고 있었고, 이에 대원군이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다른 세력과 연계되어 있는 천주교를 탄압했다고 주장했다.
1866년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자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제들과 남종삼 등 대표적 신자들이 서울 및 그 밖의 지역에서 잡혀 순교하였다.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체포와 처형이 진행되는 가운데 대왕대비 조씨는 3월 10일에 주4를 금지하는 교서’를 내려 아직 체포되지 않은 선교사제와 신자들을 소탕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렇게 박해가 치열해지자 피신해 있던 선교사제 가운데 주5 신부는 7월 조선을 탈출하여 청나라의 천진(天津)으로 가서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로즈(Roze)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에 로즈 사령관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9~11월에 걸쳐 정찰의 임무를 띤 1차 원정과 프랑스 선교사제 살해의 책임을 묻고 조약 체결을 이끌어 낼 목적의 2차 원정을 시행했다( 병인양요(丙寅洋擾)). 2차 원정 때 프랑스 함대는 강화도를 점령하면서 조선 정부의 굴복을 기대했으나 조선 정부는 대응할 군사를 파견했고,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군은 강화도에서 철수했다.
조선 정부는 병인양요를 신자들이 프랑스군과 내통한 결과라고 생각했고, 이후 신자들의 체포와 처형이 급격히 늘어나는 등 박해가 격화되었다. 서울에서는 기존의 새남터와 주6 밖이 아니라 양화진이 신자들의 처형 장소로 사용되었다. 대원군이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그로 인해 조선의 강역이 서양 오랑캐들에 의해 더럽혀졌으니, 양화진을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병인양요로 재개된 박해는 1867년을 넘어 1868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런 가운데 1868년 5월에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Oppert)와 병인박해 때 조선을 탈출한 페롱(Féron) 신부가 충청도 덕산에서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파헤치려 한 사건이 발생했다. 도굴은 결국 실패하고 오페르트 일행은 도망쳤지만, 조선 정부의 대신들이 서양인들을 부추기고 호응한 천주교 신자들을 모두 잡아 처형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박해가 격화되었다. 수많은 신자들이 서울, 경기, 충청도, 경상도 등지에서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이때는 주7 신자들까지도 처형할 정도로 탄압이 심하였다.
1871년에는 미국 함대가 조선을 침공한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발생하였다. 신미양요는 1866년 8월에 조선군의 주8을 받고 대동강에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침몰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일어났다. 1871년 5월 21일에서 7월 3일까지, 로저스(Rodgers) 사령관이 이끄는 미국 함대는 경기도 앞 바다에 머물면서 강화도를 공격했고 조선 정부와의 교섭을 타진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서울의 종로와 8도 각 지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는 등 주9 의식을 표명했고, 결국 미국 함대는 철수했다. 미군과 대치하는 중에 조선 정부는 조선인들이 미군의 길잡이를 했다고 여기고, 체포된 신자들을 제물진두와 강화 주10 나루에서 처형했다.
이후에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다가 1873년 12월 24일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면서 병인박해가 끝이 났다. 그러나 8년 동안 지속된 박해는 교회 조직을 철저히 파괴했고, 전국적으로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켰다.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나오는 ‘8천 명 순교설’은 현재 정설처럼 되어 있지만, 풍문에 근거한 과장된 수치이다. 관련 자료를 종합해 보면, 대략 2,000명이 체포되고 그중 1,400명 정도가 순교한 것으로 나온다. 그렇지만 기록에서 파악되지 않은 순교자들이 더 있었을 것이므로, ‘1868년 9월 이전에 2,000명 이상이 희생되었다’는 칼레(Calais) 신부의 1868년 9월 8일자 서한 내용이 당시의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병인박해 전체 시기의 순교자는 ‘2,000명 이상’에 1869~1872년까지의 순교자 수를 더한 숫자가 될 것이다.
자료에서 확인되는 통계에 의하면, 병인박해 때 체포된 신자는 1868년에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1866년, 1867년, 1871년, 1869년, 1870년, 1872년 순이었다. 남성 신자는 1866년에, 여성 신자는 1868년에 가장 많이 체포되었으며, 천주교 신자의 대부분이 1866~1868년 사이에 체포되었다. 이를 통해 병인양요(1866년)와 남연군묘 도굴사건(1868년)이 박해에 미친 영향력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여성 신자보다는 남성 신자의 체포 비율이 높았다. 여성의 경우 1868년에는 체포 비율이 높은 반면, 1866년에는 낮게 나타나는데, 이러한 현상은 박해 초기에는 여성이 체포의 주된 대상이 아니었으나, 1868년에는 여성도 예외 없이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1868년 박해를 무진박해, 1871년의 박해를 신미박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1866년 이래 조선 정부가 지속적으로 천주교 탄압을 시행했기 때문에 병인박해(1866~1873)로 통칭하고 있다. 천주교가 전파된 이후 최대의 박해이고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낸 병인박해는 천주교의 박멸이라는 국내 정치적 측면뿐 아니라 통상조약과 종교 자유를 앞세우고 밀어닥친 서구 세력에 대한 대항이었다는 점에서 동 · 서양 충돌이라는 세계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병인박해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천주교는 1886년 한불조약 이후 다시 교세를 회복하게 되었으며, 점차 전교와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면서 한국 사회에 정착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