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명 토마스. 충청남도 예산 출신. 신유박해 때의 순교자 홍낙민(洪樂民)의 손자이며, 기해박해 때 순교한 홍재영(洪梓榮)의 아들이다. 어머니 정소사(丁召史)는 초대 명도회장(明道會長)이며 신유박해 때의 순교자 정약종(丁若鍾)의 맏형인 정약현(丁若鉉)의 딸이다. 홍재영이 1801년 전라도 광주로 유배된 후 그곳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은 그는 1839년에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러나 부친과 부인 심 바르바라는 순교했지만, 본인은 석방되어 충청도 예산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1855년 2월 메스트르 신부의 명을 받고 선편으로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갔다. 그는 조선교구의 제4대 주교로 임명된 베르뇌(Berneux, S. F., 張敬一) 주교를 만나, 그와 푸르티에(Pourthie, J. A.) 신부, 프티니콜라(Petitnicolas, M. A.) 신부를 인도하여 1856년 3월 서울에 도착했다. 그런 다음 주교를 전동에 있는 이군심(李君心)의 집에 기거하게 한 후 예산 본가로 내려갔다. 1861년 재혼한 처자가 죽자 음력 3월에 상경하여 주교와 함께 살며 주교의 일을 도왔고, 음력 5월에는 주교의 거처를 전동에서 태평동으로 이전하였다.
그러던 중 1864년부터 러시아가 두만강 근처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고, 조선 정부가 이를 위협으로 느끼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종교의 자유를 얻을 목적으로 김면호(金冕浩)·이유일(李惟一) 등과 상의하였다.
그 결과 러시아 사람을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프랑스 및 영국과 조약을 맺는 데 있으며, 이 조약을 맺는 데는 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주교를 통해서 교섭하는 것이 좋다는 방아책(防俄策)을 대원군 딸의 시아버지인 조기진(趙基晉)을 통해서 대원군에게 제출하였다.
그러나 별다른 반응이 없자 천주교인으로 승지 벼슬을 지낸 남종삼(南鍾三)에게 그사이의 경위를 설명하고 방아책을 다시 청원하도록 종용하였다. 이에 남종삼은 자신이 직접 작성한 청원서를 대원군에게 제출하였는데, 오히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주교를 비롯한 많은 성직자와 신자들이 순교하는 병인박해를 몰고 왔다. 대원군은 처음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국외의 상황이 바뀌면서 박해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던 것이다.
1866년 2월 23일 베르뇌 주교와 함께 잡혀, 3월 7일 주교가 새남터에서 순교하던 날, 남종삼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