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공습(公習), 호는 기원(淇園). 첨정 이명권(李命權)의 아들이다.
1861년(철종 12) 전라우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863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선봉이 되어 로즈(Roze, P. G.)제독이 이끄는 프랑스함대를 물리쳤다.
어영중군 재임 중 양화진(楊花津)에 프랑스전함 2척이 출현하였을 때 훈련도감의 군인을 징발하여 서강(西江)을 경계하였고, 프랑스군이 강화부와 통진부를 습격하여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자 기보연해순무사중군(畿輔沿海巡撫使中軍)에 임명되어 2,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통진부에 진입하였다.
이어 별무사(別武士) 지홍관(池弘寬)을 파견하여 기보연해순무영에서 작성한 프랑스함대의 침공을 공박하고, 토벌을 기약하는 격문을 보내어 철군을 촉구하였다. 프랑스군이 정족산성(鼎足山城)을 정찰하고 전등사(傳燈寺)를 약탈하자 천총(千摠) 양헌수(梁憲洙)를 보내어 정족산성에 잠복시키고, 프랑스군 6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려 프랑스함대가 퇴각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이 공적으로 특별히 형조판서에 발탁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총융사·어영대장을 역임하였다. 1868년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거쳐 이듬해 진무사(鎭撫使)가 되었고, 1871년 다시 어영대장에 임명되었다가 1873년 훈련대장, 1875년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에는 김병학(金炳學)·홍순목(洪淳穆)·양헌수 등과 함께 조정에서 개국을 반대하는 보수적 쇄국척화론을 고수하였다. 시호는 정의(靖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