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준보(俊甫), 본관은 순흥, 아버지는 안국균(安國均)이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심복으로서, 1867년 동래 부산에 주재하면서 왜학훈도(倭學訓導)가 되어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과 함께 대일외교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1869년 대마도주(對馬島主) 소씨[宗氏]가 보내 온 외교문서(書契)가 일본의 왕정복고 이전의 격식과 다르므로 이의 수리를 거부하는 한편, 차사(差使)의 파견 역시 전례에 없는 일로 속히 돌아갈 것을 강경히 요청하였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이듬해 정현덕과 함께 공금유용혐의로 파직당하고 동래부에 유배되었다.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홍순목(洪淳穆)·강로(姜㳣) 등 중신들에게 글을 올려 민비측의 세자책봉문제를 비난하고 비밀외교를 반박하며 그 실정을 통론(痛論)하였으므로, 1875년 동래부 경계상에서 효수형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