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고종 19)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 감공사(監工司)의 주사로 임명되어 개화정책에 따른 새 기구에 진출, 참여하였다.
1881년 영선사로 청나라에 파견된 김윤식(金允植)이 이듬해 임오군란의 발발로 일단 귀국하였다가 기기(機器)의 구입과 잔류 유학생의 철환문제로 1882년 9월 다시 톈진[天津]에 파견될 때 종사관으로 수행하였다.
그리고, 영선사가 임무를 마치고 귀국한 뒤에도 톈진공관에 머무르면서 청나라의 병기공장 등을 견학하였다. 1883년 3월 청나라의 주선으로 톈진공장(天津工匠) 원영찬(袁榮燦) 등 4명을 데리고 귀국하여 서울 삼청동 북창(北倉)에 기기창(機器廠)을 건립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병기공장의 창건이었다.
그해 5월에는 기기국방판(機器局幇辦)에 임명되어 건창(建倉)의 역사를 담당하였다.